眞理와 求道者/성경연구

[스크랩] 아라랏산과 노아의 방주 터 (터키)/앗달리아(안탈랴, 터키

心中火熱頭腦冷精 2013. 8. 15. 12:15

 


대아라랏산 전경          

 

대아라랏산 전경          

 

도우베야짓 터미널, 노아방주 터를 가기위한 터미널  

 

노아방주 터 입구

 

노아방주 기념관

 

기념관 내부  ,  노아방주 터를 처음 발견한 노인과 함께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방주 나무

방주 터  

방주 돌닺

방주 터

방주 터 발견의 역사

노아방주 모형  

 

노아방주 터 위성사진

 

미국 일간 USA 투데이는 9일자 온라인 기사에서 '노아의 방주 미스터리'가 또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부 연구자들이 '노아의 방주'로 주장해 온 물체(혹은 지형)를 담은 선명한 위성 사진이 공개되었기 때문. 포르세 테일러 등 노아의 방주 연구자들은 성서에 묘사된 40일 대홍수가 끝난 뒤 방주가 터키 아라라트 산에 안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해왔다.

그 증거로서 4663미터 높이의 산허리에 있는 비정상적인 지형의항공 및 위성 촬영 사진이 제시되어 왔다. 그림자에 불과하다거나 자연 지형이라는 반박도 있었지만,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라는 가설도 있어 왔다.

그런데 최근 문제의 지역을 촬영한 선명한 위성 사진이 공개되면서 다시 논란이 가열되기 시작했다. 디지털글로브(DigitalGlobe)사의 위성이 2003년에 촬영한 사진이 일반에 공개된 것이다. 노아의 방주가 실존한다고 믿고 10여 년 동안 연구를 진행해온 포르세 테일러는, 이번에 공개된 사진이 노아의 방주 미스터리를 푸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문제의 물체가 노아의 방주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길이와 너비가 6:1 비율로 노아의 방주에 대한 성서 기록과 일치한다는 것이 그가 제시한 논거 중 하나. 아라라트 산허리의 물체 길이는 309미터이다.

언론은 상업 위성 사진은 물론 군사 위성 사진들도 속속 공개되고 있기 때문에 머지않아 노아의 방주 미스터리가 풀리게 될 것으로 낙관하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사진 : 디지털글로브사의 상업위성 퀵버드가 2003년 촬영한 사진

ⓒDigitalGlobe 출처 www.space.com) 


 

노아의 방주로 추정되는 아라랏산의 지형      자료출처 - [http://www.specialtyinterests.net]

 

지형을 토대로 노아의 방주를 복원해 본 상상도

 

노아의 방주 [Noah's ark] 


모든 사람들이 타락한 생활에 빠져 있어 하느님이 홍수로 심판하려 할 때 홀로 바르게 살던 노아는 하느님의 특별한 계시로 홍수가 올 것을 미리 알게 된다. 그는 120년에 걸쳐 방주(길이 90.9m, 너비 15.15m, 높이 9.09m, 상 ·중 ·하 3층으로 된 배)를 만들어 8명의 가족과, 한 쌍씩의 여러 동물을 데리고 이 방주에 탄다. 대홍수를 만나 모든 생물이 전멸하고 말았지만, 이 방주에 탔던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은 살아 남았다고 한다. 노아라는 말은 헤브라이어로 ‘휴식’이라는 뜻인데, 노아는 신앙의 모범, 방주는 신자의 단체인 교회, 대홍수는 하느님의 심판을 상징하며, 원시교회 이래 그리스도교 예술의 소재로 많이 다루어지고 있다

 

 

노아방주 터      

 

 

노아방주 터

 

노아방주 터

 

노아방주 터

 

방주 돌 닻으로 추정되는 돌  


 

 

 

방주의 발라스트(ballast 배의 안정을 위해 바닥에 싣는 돌)로 추정되는 돌

 

 

대갈못 잠금장치(rivet fastener)추정되는 금속     (출처 : 민이의 세계문화유산기행 [World Heritage]

 

아라랏 산 탐험과 방주의 발견

 

아라랏산은 현재 터키에 있는 해발 5165m 이상의 고산이다. 이 산은 지난 수백년간 기독교 성서의 `노아의 방주` 목격설이 있던곳으로, 현재까지 이곳은 많은 나라의 탐험가들이 산밑에 거주를 하며 끊임없이 방주를 찾고있다고 한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수천번 노아의 방주 조형물 목격담이 있던 터키의 고산 아라랫. 과연 아라랫산에는 수천, 혹은 수만년전 노아가 큰 홍수를 피하기위해 만들었다는 방주가 얼음과 눈속에 파뭍혀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것일까?  과거 수백 년간 탐험가들과 인근 주민들은 노아의 방주와 그 유물을 찾기 위하여 아라랏 산을 등반했고 방주를 발견하거나 방주의 잔해 조각을 가지고 온 기록은 아래와 같다. 

 

1) 1886년 제임스 브라우스는 단독으로 아라랏 산을 등반하던 중 방주 조각으로 보이는 돌같이 굳은 목재를 가지고 왔다

2) 1887년 죠셉 노우리는 방주를 발견했는데 그 위치는 나무가 한 번도 자란 적 없는 불모지였다.

3) 1905년 목동인 야곱은 잃어버린 염소를 찾아 가다가 방주를 발견하였다.

4)1908년 목동인 죠지는 아라랏 산에서 방주를 보았다.

5) 1916년 러시아 군인이 비행 중 방주를 발견하였다.

6) 1936년 뉴질랜드인 하드위크 나이트는 아라랏 산 등반 중 직사각형의 선재(船材)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방주에 대한 성경의 설명은 명백한 사실이다. 방주는 목재로 만들어진 거대한 배였다. 방주가 매우 거대한 규모로 만들어졌다는 목재의 크기를 보고 능히 추정할 수 있었다. 선체의 대부분은 눈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그 내부구조를 살펴볼 수 없었다.(죤 몽고메리의) 

7) 1938년 소련 공군의 한 조종사는 아라랏 산 공중 탐사 중 해발 1만4천 피트(4.2km) 상공에서 얼음 밖으로 약 80~90피트(27m)쯤 튀어나온 방주의 사진을 찍었다.

8) 1948년 9월 레쉬트라는 쿠르드인 농부는 협곡에서 녹은 얼음 위로 드러나 있는 방주의 뱃머리를 발견했다. 뱃머리는 거의 완전하게 드러나 있었으며 방주의 대부분은 아직도 빙하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는 당시의 목격담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전에 배라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방주를 목격했을 때 그것이 배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9) 1952년 미국인 죠지 제퍼슨 그린은 헬리콥터로 100미터 위에서 6장의 선명한 방주의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실제로 본 어느 미국인은 "솔직히 고백해서 나는 성경을 믿어본 적이 없답니다. 하지만 그 사진을 보고 성경의 기록이 사실이요, 성경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라고 말했다. 

 

1953년 페드랑 나바라가 아라랏 산 탐험 도중 방주를 발견하였다. 그는 후에 아라랏 산에서 노아 방주의 나무 제목을 가져왔는데 그것을 정밀 분석해 본 결과 그 나무는 유프라테스 평원에서만 자라는 나무임이 밝혀졌다(유프라테스 지방은 당시 노아가 배를 만든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1974년 미국 'NASA'의 인공위성 사진에 의해 아라랏 산위에 노아 방주가 발견되었다. 1974년 터키 정부가 아라랏 산에 외국인들의 여행과 탐험활동을 금지한다는 공식 발표를 하였다.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방주가 발견된 곳이 소련의 군사기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라 하였다. 

 

1984년 미국 NASA인공위성 어츠호는 인공위성 사진에 의하여 아라랏 산에 방주가 머물러 있음을 증거하였다(1990년 6월 학생과학) 1984년 미국 국제탐험단의 마빈 스티핀스는 아라랏 산에서 노아의 방주를 발견했는데 배 모양의 형태는 대략 길이가 136미터 넓이가 24미터 높이가 14미터인데 이는 성경에 나오는 길이 "300규빗, 넓이50규빗, 길이 30규빗'과 같은 것이다. 

 

1992년 현재는 터키 정부가 소련연방의 해체와 무신론인 공산주의의 위협이 퇴조되는 때를 같이하여 세계적인 관광지로 개발을 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탐험가인 마르코폴로(A.D1234~1324)는 그의 저서 '동방견문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은 수천 년간의 쌓인 눈 때문에 아무도 오를 수 없는 아르메니아의 어느 산봉우리에 노아의 방주가 아직도 잠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눈은 결코 녹지 않는다. 눈은 강설(降雪)이 있을 때마다 더 두껍게 쌓일 뿐이다』(마르코 폴로)

 

'노아의 방주' 터키 아라라트山에서 발견 (2010.4)

   

중국과 터키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복음주의 탐사대가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를 터키 아라라트산에서 찾아낸 것 같다고 주장했다. 2010.4.27일(현지시간) AFP통신 등 외신들에 따르면 탐사대는 터키 동부 아라라트산의 해발 고도 4000m 지점에서 거대한 목조 구조물을 발견했다. 목재 표본의 탄소 연대를 측정해본 결과 목재는 4800년 전의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노아의 방주가 띄워졌다는 시기와 비슷하다. 탐사대원 15명 가운데 한 사람인 홍콩의 다큐멘터리 제작자 양융샹(楊永祥)은 “이번에 발견한 구조물이 노아의 방주라고 100% 확신 못하지만 99.9%는 확신한다”고. 목재 구조물은 여러 칸으로 구분돼 있다. 몇몇 칸에는 나무 기둥까지 받쳐져 있다. 이는 동물 우리로 추정된다. 탐사대는 목재 구조물이 인간의 거주 시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근 지역 해발 고도 3500m 이상에서 지금까지 거주 시설이 발견된 적은 없기 때문이다. 현지 당국은 중앙정부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 등재를 신청하도록 요구할 방침이다. 발굴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까지 목재 구조물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창세기에 따르면 세상이 타락한 데 노한 여호와는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리리라 작정하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했다. 그리고 방주에 모든 동물을 한 쌍씩 태우도록 했다. 세상을 가득 채운 물이 서서히 빠지면서 방주는 어느 산에 안착하게 된다. 많은 사람이 그 산을 인근에서 가장 높은 아라라트산이라고 믿고 있다

 

# 일간스포츠 1974. 4. 11.

“노아의 방주 - 아라라트 산정(山頂) 얼음 속에 있다. NASA 인공위성 사진 분석이 발단. 성서학자·종교단체 앞다퉈 현지탐험을 서둘러”


# 복음신보 1974. 3

“인공위성과 성서의 신비 - 노아의 방주는 아라랏 산정 얼음 속에 있다. 과학으로 부정했던 성경 속 신비, 이제는 과학으로 증거하게 됐다”


# 주간조선 1988. 9. 4.

“터키 아라라트산 ‘노아의 방주 묻힌 곳’ 해발 5,165m 관광객 붐빈다”# 동아일보 1984. 8. 27. “「노아의 방주」터키 ‘아라라트’ 산서 찾았다.구약성서에 나오는 것과 모양 크기 같아. 미 탐험대 해발 4,585m서 발견”


# 조선일보 1970. 7. 4.

“고고학자들을 깜짝 놀라게 한 「노아의 방주」를 발견했다.”


# 일간스포츠 1977. 4. 2.

“「노아 방주」를 탐색- 노아의 방주는 수세기 동안 여러번 발견됐었으며 1916년 낙하산으로 투하된 백러시아 군대 150명은 실제로 방주 안에 들어가 보고 크기를 재었으며 사진도 찍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방주 안에서 쇠창살이 달린 짐승 우리와 짐승의 털 그 밖에 유품들을 발견하고 돌아와 황제(니콜라이 Ⅱ세)에게 자세히 보고했으나 곧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 이같은 종교적인 사실은 묻혀 버리고 말았다는 것. 이 중 살아남은 4명의 러시아인들이 후에 미국과 캐나다에 와서 들려준 경험담을 듣고 ’74년 탐험을 감행한 2명의 미국인은 터어키의 아라랏산 중턱에서(약 5,000m) 방주로 믿어지는 배의 600m 부근까지 접근했으나 심한 구름과 안개 그리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노아의 방주 재발견』, 『노아의 방주를 찾아서』 등의 책을 출판했다.”


# 전일신문 1970. 4. 11.

“다시 떠오르는 노아의 방주 행방. 과학자들 사진 분석이 발단 - 아라라트 산정 얼음 속에 있다. 터어키·소련·이란 접경 근처, 학자들 다퉈 현지 답사. 지구자원 기술위성이 지상 720km상공에서 촬영한 필름에 아라라트 산 위의 한 구조물이 찍혔다. 사진에 나타난 실제의 윤곽은 성서에 나타난 방주의 칫수(길이 137m, 너비 45m, 높이 22m)보다 다소 크지만 그늘진 그의 내부는 칫수가 꼭 맞아 떨어질 수 있다고 몽고메리 박사가 말했다. 몽고메리 박사는 3차례 탐색을 시도했으며 『노아의 방주 탐색』이라는 책도 저술했다.”


# 조선일보 1974. 7. 6.

“표고 5,165m의 아라랏산은 구약성서 창세기에 기록된 그 유명한 노아의 방주가 멎었던 산. 이곳을 지나간 고금의 모든 여행가들은 이 노아의 방주의 산에 대해 언급해 놓고 있으며, 이를 확인하기 위한 탐험대가 1829년에서 1955년에 이르기까지 수십 차례 파견돼 오기도 했었다.

1883년 터키 군부에서 파견된 탐험대가 정상 부근의 빙하에서 거대한 골조의 목조물을 발견하였고, 1916년에는 러시아 군부에서 150명에 이르는 대탐험대를 파견 거대한 배의 유해를 발견했었다.

프랑스의 탐험가 페르난드 나바라는 18년 동안 노아의 홍수와 방주에 관한 면밀한 문헌 조사 끝에 그 진실성을 인정하고 1952년부터 3년간에 걸쳐 현지 탐사를 감행했다. 그는 4,100m 지점에서 거대한 배의 현(舷) 부분을 발굴, 1m 50㎝로 잘라서 짊어지고 돌아왔다. 전문가에 감정시켜 보았더니 구약성서시대의 목재임이 틀림 없다는 고증을 얻은 것이었다.”


# 중앙일보 1984. 8. 27.

“터어키서 노아 방주 발견. 미 탐험대 5,000m 산에서 - 미 제임스 어윈이 터키 동부 해발 5,165m의 아라라트산에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를 발견했다고 주장. 탐사대장 스틴핀스 씨는 앙카라의 미 문화원에 전화를 걸어 어윈이 지난 22일 이 산을 등반한 뒤 방주를 발견했다고 전하고 공식발표를 하기 위해 문화원 측에 기자회견을 해 두도록 요청했다고 발표했다

6

//

 

 

 

앗달리아(안탈랴, 터키)  

앗달리아(안탈랴, 터키)

 

 

 


안탈랴(앗달리아) 항구

 


안탈랴 해안 유적지

 

오스만투르크 시대의 모스크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일 장식의 아름다운 16세기 무랏파샤 모스크와 18세기의 테케리 메스켓 파샤 모스크이다. 항구 바로 옆에는 천연 샘 위에 네 개의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잘라낸 돌을 얹어서 만든 19세기 후반의 매력적인 우스케레 모스크가 있다. 케시크 미나레트 모스크는 로마, 비잔틴, 셀주크, 오스만투르크 시대에 이르는 이 도시의 긴 역사를 말해준다.

 


 

이블리미나레(사원)는 13세기 초 셀주크 터키인들이 세운 것이다. 45m 높이의 첨탑을 지니고 있다.  이 첨탑은 술탄 알라딘 케이크바트에 의해 세워진 것인데, 사각 받침대 위에 만들어진 벽돌 첨탑은 세로로 홈이 파져 있고, 모자이크 형태로 된 푸른 돌과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본래 동로마 시대 교회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는데, 셀주크 왕조시대에 이스람 사원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첨탑을 세운 것이다. 오늘날 보이는 사원은 14세기에 교회 터 위에 지어진 것이다.

 


하드리안 황제 문

 

안탈랴 항구 성벽 안에 세워진 세 개의 아름다운 아치형 문은 기원전 130년 하드리안 황제가 안탈랴를 침입했을 때 그의 영예를 칭송하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항구 근처에는 이 문과 성벽의 다른 부분을 나누는 두 개의 탑이 남아 있다.

 


 

후두를룩 탑은 2세기 때 만들어진 등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로마 아스펜도스 원형극장

 

아스펜도스는 안탈랴의 동쪽 47킬로 지점, 고대 유리메돈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고대 도시 아스펜도스는 위 부분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와 아랫부분의 로우어 시티(Lower City)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있다. 아고라, 불레테리온, 예배당, 기념분수는 도시의 윗부분인 아크로폴리스에 있고, 극장, 스타디움, 로마 목욕탕과 수로(水路)는 아랫부분에 있다. 원형 극장 아스펜도스는 약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로서, 로마 시대(AD 2세기 후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AD 121-180) 황제 재임 시 유명한 건축가 제논에 의해 세워졌다. 관중석의 일부는 아크로폴리스 열의 언덕에 의지하여 만들어졌고, 나머지 부분은 둥근 지붕이 있는 하부구조 건물로 만들어졌다. 높은 무대 건물은 대부분의 다른 극장과는 달리 관중석과 분리되어 있다. 구조물은 일반 원형 극장과 별다른 것이 없지만, 입구부터 그 시대 귀족과 평민이 사용하는 문이 구별되어 있고, 관객석 역시 다르게 구별되어 있다.

 


 


무대 건물은 셀주크 시대에는 대무역상들을 위한 숙소로도 사용되었고, 끊임없이 복구한 덕분에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고대에 세워진 극장 중 보존이 가장 잘 된 것이다.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복구하여 야외 공연장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앗달리아


소아시아에 있는 로마의 속주 밤빌리아 해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 ‘아달리아’(Adalia)이다. - B.C. 145경 버가모의 왕 앗다로스 2세가 자신의 이름을 붙여 세운 도시이다. 밤빌리아 지역의 소아시아 남서쪽 해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현대의 ‘아달리아’(Adalia)이다. 앗달리아는 ‘카타락테스’(Catarrhactes) 강에서 약 37m 정도 융기되어 있는 평평한 석회암 대지에 위치해 있다. 앗달리아의 역사는 버가모의 ‘아탈루스 2세’에 의해 설립되었고, 그의 이름을 따서 ‘앗달리아’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소아시아 서쪽 연안, 밤빌리아의 가장 중요한 출구이다. 앗달리아는 남서쪽의 풍부한 ‘프리지아’(Phrygia)지역과 교역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리쿠스’(Lycus)와 ‘메안데르’(Meander), 그리고 에베소와 서머나로 향하는 교역로가 앗달리아를 통과했다. 시리아와 이집트로 가는 길로도 편리하게 이용되었다. 앗달리아는 페르시아, 마케도이나, 시리아의 셀류커스 왕조, 앗달리드, 그리고 로마의 계속적인 침공으로 황폐하게 되었다. 앗달리아는 본래 버가의 외항으로 사용되었는데, 초기 기독교 시대의 주요 도시 지역이 되었다. 앗달리아는 고대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서 터키의 남쪽지방에 위치하고 있고, 아름다운 해변을 지나고 있기에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도시로 알려져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방어 시설물들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고, 중세 도시 성벽들에서 발견된다. 가장 인상적인 고대의 경계표는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만들어진 삼층으로 된 문이다. ‘하드리아누스’(Hadreanus)가 세운 ‘명가고딕 아치형’ 문과 고대의 수로는 기념비적 건물이라 할 수 있다. 바울과 실라가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중에 들렸던 곳이다.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사도행전 14:25)

                  
 
 
 
 

 

 

 

 

 

 

 

 

곱ㅣ우ㅣ물ㅣ

출처 : 야곱의 우물가
글쓴이 : 예수쟁이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