眞理와 求道者/이슬람 관련

[스크랩] 002. 투르크인과 터키의 만남(셀주크 투르크).

心中火熱頭腦冷精 2013. 12. 19. 14:23

오늘날의 터키 영토.

 

 

기영에게.

 

지난 편지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전신인 셀주크 투르크라는 나라가 어떻게 생겨났고 발전했는가를 살펴보았는데...

 

그런데 위의 지도에서 알 수 있듯이, 오스만 투르크의 후손들인 오늘날의 터키인들은 아나톨리아라고도 불리고 소아시아라고도 불리는 곳에 산단 말이지...?

 

지난 편지에서 이 지역은 언급되지 않았었는데,

그렇다면 과연 투르크인과 터키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건 언제부터일까.

 

지난 편지에서, 이번 편지에 셀주크 투르크의 전성기 때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었는데...

 

자, 셀주크 투르크의 전성기와 투르크인과 터키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해볼게.

 

 

1059년, 셀주크의 손자이자 셀주크 투르크를 이끌던 형제 가운데 형인 차그리 베그가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되자 셀주크 투르크의 초대 술탄인 동생 투그릴 베그가 혼자서 셀주크 투르크를 이끌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4년 뒤인 1063년, 투그릴 베그가 세상을 떠나.

그리고 투그릴 베그의 아들인 알프 아르슬란이 2대 술탄으로 즉위하지.

 

알프 아르슬란이 즉위한 이듬해인 1064년, 셀주크 투르크는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를 셀주크 투르크의 영토로 만들었어.

 

그야말로 지도자가 바뀌어도 계속해서 뻗어나가는 중이라는 이야기지.

 

다시 4년 뒤인 1068년에는, 당시 비잔틴 제국령이었던 아나톨리아를 침공하기 시작했어.

비잔틴 제국은 당연히 반격에 나섰는데...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다.

 

셀주크 투르크의 아나톨리아 침공.

녹색 화살표가 셀주크군, 붉은색 화살표가 비잔틴군의 진격로다.

Manzikert라고 쓰여있는 곳이 만지케르트다.

 

 

1071년 8월 26일.

셀주크 투르크군 2~3만(기록에 따라 다르다고 함)과 비잔틴군 4~7만이 만지케르트라는 곳에서 만났다.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쪽은 알프 아르슬란이 친히 이끄는 셀주크 투르크군이었는데,

이겨도 보통 크게 이긴 것이 아니어서 비잔틴 제국 황제 로마누스 디오게네스 4세를 포로로 잡았다고 해.

 

이것을 계기로 투르크인들은 아나톨리아로 진출해 정착하기 시작, 아나톨리아는 점차 투르크화되어갔다.

 

오늘날 터키의 역사가 시작되는 셈이라고 할까...

 

오늘날 터키 역사의 시작이라고 해도 좋을, 만지케르트 전투.

 

 

그런데 만지케르트 전투의 승리자 알프 아르슬란과 포로로 끌려온 로마누스와의 대화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는데...

 

먼저, 알프 아르슬란이 이렇게 물었대.

'만약 내가 그대 앞에 포로로 끌려왔다면, 어찌 하셨겠소?'

 

그러자 로마누스가 답하기를,

'그렇다면 아마 나는 그대를 참수하고, 콘스탄티노플 거리에 내걸었을 것이오.'

 

로마누스의 그 말에, 알프 아르슬란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 처벌은, 그것보다 훨씬 무겁소. 나는 그대를...

용서하고, 자유롭게 풀어 주겠소.'

 

 

뭔가 가슴에 확 와닿는 부분 아니니?

개인적으로 이 일화를 처음 읽었을 때, '이슬람의 관용' 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게다가 알프 아르슬란은, 풀어주겠다고 말만 한 것이 아니라 로마누스에게 경호원까지 붙여주어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게 해주었다고...

 

이슬람을 창시한 무함마드가 모스크 한쪽 구석에 기독교 제단을 만들어서 기독교 의식을 치를 수 있게 해주었다는 부분과 함께, 기억해두기에 충분한 일화가 아닐까...?

 

           

만지케르트 전투의 주인공들인 알프 아르슬란과 로마누스 4세.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해 포로로 끌려온 적장을 아무 대가도 없이 풀어주었던 알프 아르슬란은,

만지케르트 전투 이듬해인 1072년에 중앙아시아의 카라한이라는 곳을 공격하다 입은 부상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아들 말리크 샤가 즉위했다.

 

말리크 샤.

 

 

말리크 샤 시대에도, 셀주크 투르크의 영토는 그칠 줄 모르고 확장되어 나갔어.

그리고 그 결과, 중동의 이슬람 세계는 아바스 왕조가 제 구실을 다하던 시절(즉, 칼리프가 정권을 잡던 시절) 이후 처음으로 재통합됐다고 해.

 

이런 공 때문인지, 말리크 샤는 1087년에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로부터 '동방과 서방의 술탄'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얻기에 이른다.

 

말리크 샤가 세상을 떠난 해인 1092년의 셀주크 투르크 영토.

1092년은, 셀주크 투르크가 가장 넓은 영토를 자랑하던 해이기도 했다.

 

 

알프 아르슬란이 즉위하는 1063년부터 말리크 샤가 세상을 떠나는 1092년까지의 30여년 동안을, 후대 역사가들은 셀주크 투르크의 전성기라고 평가하고 있어.

 

하지만 이런 전성기는, 두 술탄이 영토 확장에 여념이 없는 동안 내정을 돌본 재상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는데...

 

그 재상이, 니잠 알물크라는 사람이다.

 

 

투르크인이 아니라 페르시아 출신인 니잠 알물크의 본명은 아부 알리 하산 이븐 알리인데,

니잠 알물크라는 말은 한국어로 '국가의 질서'라는 뜻이래.

오죽 정치를 잘 했으면 국가의 질서라는 말이 이름처럼 쓰였을까...

 

 

니잠 알물크는 행정조직을 재편하는 등 정치에 힘쓴 것은 물론 셀주크 투르크 영토 곳곳에 학원을 설립해 인재를 양성하는데, 이 학원들은 니잠 알물크 사후 그의 이름을 따 니자미야 학원이라고 불렸다고 해.

 

한편 이슬람 신학교인 마드라사 조직을 설립해, 관료들과 성직자들에게 통일된 교육을 받게 했어.

 

다른 한편 상업과 농업이 발전하고, 다른 인종과 종교에 관용을 베풀어 질서와 안정이 유지될 수 있었다.

 

또 말년에는 말리크 샤의 요구를 받아들여 정치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대한 책인 <정치의 서>를 쓰는데, 이것은 일화와 사실을 적당히 섞어 쓴 것으로 산문문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고 해.

 

아쉽게도 페르시아어로 쓰여있어서, 한국어로 번역하면 맛이 떨어지겠지만.

 

아무튼 니잠 알물크는, 정적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하는 1092년(말리크 샤가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함)까지 알프 아르슬란과 말리크 샤라는 두 사람의 술탄을 보필하면서 셀주크 투르크의 문화적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셀주크 투르크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겠지...

 

바그다드에 있는 니잠 알물크 기념상.

정치에 뛰어났던 한편 학문과 문화의 옹호자였던 니잠 알물크 덕분에,

셀주크 투르크는 내부적으로도 전성기를 누렸다.

덧붙여, 니잠 알물크가 세상을 떠난 것이 1092년 10월이고 말리크 샤가 세상을 떠난 것이 그해 11월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나란히 눈을 감으면서, 셀주크 투르크의 전성기도 끝나게 된다.

 

 

전성기의 셀주크 투르크는, 이런 모습이었다.

뛰어난 지도력을 가진 술탄들 덕분에 영토는 나날이 늘어나고, 정치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재상 덕분에 내부적으로도 번영을 누리고.

 

하지만 셀주크 투르크의 황금시대는, 말리크 샤와 함께 숨을 거두게 된다.

 

그 원인은, 니잠 알물크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내부적인 것이었는데...

 

다음 편지에서는, 셀주크 투르크가 어떻게 쇠퇴하고 멸망에 이르게 되는지.

그 이야기를 해줄게.

 

 

그럼 그때까지, 행복하기를~

출처 : 그레이즈의 어제와 오늘
글쓴이 : 그레이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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