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관련/인물들

[스크랩] 헤르만 불

心中火熱頭腦冷精 2014. 3. 16. 06:45

영원히 빛나는 ‘불멸의 스타’ "헤르만 불"


 

 

 

며칠 전 국내 굴지의 한 재벌기업에서 고위직 임원으로 일하고 있는 선배를 만났다. 국내외의 유명 골프장이라면 안 가본 곳이 없을 만큼 골프의 세계에 흠뻑 빠져 있는 사람인데, 언젠가 내가 함께 산에 오르지 않겠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지레 손사래부터 쳐대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니 무엇 때문에 그 험한 곳에 기어오르려고 고생을 해요?”

 

나는 세상 사람들을 산에 오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눈다. 산에 오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산 이야기를 해 봤자 소 귀에 경 읽기 일 뿐이다. 그러던 그가 이번에는 술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이렇게 물었다. “혹시 헤르만 불이라고 들어봤어?”

나는 목젖으로 넘기던 술에 사래가 걸릴 만큼 놀랐다.

 

세상에, 산이라면 집 뒤의 야산에도 오르지 않던 사람의 입에서 헤르만 불(1924~1957)의 이름이 튀어나오다니! 하지만 사연을 들어본즉슨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졌다. 자신의 회사에서 임원 재교육의 일환으로 헤르만 불의 자서전 ‘8,000미터의 위와 아래’를 읽게 했다는 것이다.

 

재벌기업 간부들을 위한 리더십 교육에서 모리스 에르족의 ‘최초의 8,000미터 안나푸르나를 읽힌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다. 이 책은 마치 소설처럼 쓰여져서 읽기도 수월하고 대단히 드라마틱하다. 하지만 '헤르만 불의 자서전'이라니? 이 책은 너무 두껍고, 지나치게 전문적이어서, 일반인들에게 권하기에는 조금 망설여지는 책이다.

 

“처음에는 정말 괴롭더라구. 무슨 책이 생판 처음 들어보는 산 이름들만 줄줄이 나오고 맨날 거기 오르락 내리락 하는 이야기뿐이니 재미도 없고.” 선배는 그러나 술자리가 무르익기도 전에 저 혼자 흥분하여 언성을 높였다. “그런데 중간쯤 읽어가니까 이건 완전히 미치겠는 거야! 우리들이 하고 있는 비즈니스하고 하등 다를 바가 없더라고!”

 

이제 궁금해진 것은 나였다. 도대체 재벌그룹의 고위 간부는 헤르만 불의 삶과 등반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지독한 준비, 과감한 결단, 그리고 진인사대천명!” 솔직히 나는 감탄했다. 등반의 세계에 무지한 그가 헤르만 불의 삶을 단 세 마디로 정확하게 꿰뚫어 내다니! 덕분에 그날 술값은 내가 냈지만 더 없이 유쾌한 술자리였다.

 

등반의 세계에 무지한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 헤르만 불이다. 그만큼 그가 1953년에 이룩한 낭가파르바트 세계 초등은 유명한 사건이다. 산악사진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히는 것이 그의 초등 직전과 직후의 사진들이다. 초등 직전의 사진 속에 나오는 인물은 29세의 싱싱한 청년이다. 하지만 초등 직후에 찍힌 사진 속의 인물은 거의 노인처럼 보인다.

 

그가 홀로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마지막 캠프로 돌아오는데 소요된 시간은 정확히 41시간. 그 이틀의 시간 동안 헤르만 불은 인류가 일찍이 체험해보지 못했던 시공간 속을 저 홀로 누비고 다녔다. 그 처절하고 감동적인 기록이 바로 그의 유일한 자서전 ‘8,000미터의 위와 아래’이다.

 

헤르만 불은 세계 등반사에서 영원히 빛나는 ‘불멸의 스타’다. 그가 인류 최초로 배낭도, 산소통도 모두 집어 던지고 혈혈단신으로 8,000m 급 산의 정상에 올랐다가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대기록이다. 하지만, 선배의 표현에 따르면, 진정 감동스러운 것은 스타가 되기 이전에 그가 쌓아온 ‘지독한 준비’다.

 

그는 23세가 되기 전에 134개의 봉우리에 올랐다. 그는 남들은 여름철에 오르는 암벽을 눈과 얼음이 뒤덮인 겨울철에 올랐다.

그는 고난도의 봉우리 25개를 33시간 만에 주파했다. 왜 그랬을까? 헤르만 불의 답변은 단순하되 묵직하다. “준비였습니다.” 언젠가 자신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목숨을 걸고 한판승부를 벌여야 할 ‘궁극의 산’을 만날 텐데, 그때를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산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헤르만 불 자신 역시 자기가 ‘무엇’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는지는 몰랐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는 “준비된 사람만이 그 무엇을 해치울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마침내 1953년의 독일-오스트리아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원으로 발탁되었을 때,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준비해왔는지를 섬광처럼 깨달았다고 한다.

 

당시 그가 남긴 한 마디는 거의 종교적인 경건함마저 느끼게 한다. “나는 준비했습니다. 내 생애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내가 아직 당신을 몰랐을 때에도 모든 것은 그 준비였습니다.” 헤르만 불은 마치 낭가파르바트에 오르기 위하여 태어나고 살아온 사람처럼 그 산에 올랐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원정대장이 귀환을 명령하고 함께 오를 동반자마저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바로 그 순간, 그는 엄청난 결단을 내린다. 모든 장비들을 다 집어 던지고 저 홀로 정상을 향하여 나아간 것이다. 그는 과연 살아서 내려올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을까? 알 수 없다. 훗날 그는 당시의 결단을 ‘최후의 모험’이라고 명명했다.

 

그것은 어떤 뜻에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이다. 하지만 그 과감한 결단의 순간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선다면 결코 정상에 이를 수 없다. 헤르만 불은 담담하게 증언한다. “8,000m와 같은 거봉은 사람이 최후의 모험을 다하지 않고 손에 넣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헤르만 불이 ‘최후의 모험’을 결단하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언제나 전율한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생환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도박이다. 하지만 결단을 못 내리고 돌아선다면 정상은 없다. 그는 그것을 해냈다. 그리고 결단의 순간, 그는 이미 승리한 것이다.

 

그는 정상에 오르지 못했을 수도 있고, 설사 올랐다 하더라도 살아서 내려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관없다. 지독하게 준비해온 사람이 최후의 결단을 내리고 나면, 이제 남은 것은 신의 몫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나면 이제 하늘의 처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발 밑에 시커먼 지옥… 잠들면 죽는다" 8,000m 정상에 꼿꼿이 선 채 '죽음의 밤'보내

 

헤르만 불이 낭가파르바트의 정상에 선 것은 1953년 7월 3일 오후 7시였다. 간단히 말해서 되돌아오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그는 캄캄한 밤에 저 홀로 하산을 시작한다. 언제나 그렇듯 등정보다 힘든 것이 하산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이젠 한 짝이 등산화에서 벗겨져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사라져버린다. 그에게 남은 장비라고는 이제 등산용 스틱 두 개와 아이젠 한 짝 뿐이다. 정상 부근에는 잠시 궁둥이를 대고 앉아서 쉴만한 공간도 없다.

 

그는 이 상태에서 꼿꼿이 선채로 비박에 돌입한다. 세계 등반사상 가장 유명한 죽음의 비박이다. 그의 자서전 ‘8,000m의 위와 아래’에는 이 장면에 대한 묘사가 압권이다. 그는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훌쩍 넘어버린 초인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내게는 추위를 막을 비박색도, 추락을 예방해주는 확보용 자일도 없으나, 앞으로 다가올 밤이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했다. 모든 일이 그저 당연하기만 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는 잠들면 죽는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면서도 깜빡 깜빡 잠이 든다. 그때마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을 확인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한다. “발 밑에는 시커먼 지옥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아직 별이 있었다. 날이 밝지 않았나 보다. 나는 애타는 마음으로 해가 떠오를 지평선에 시선을 던졌다. 마침내 마지막 별도 흐려졌다. 동이 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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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Hermann Buhl, 1924.9.21~1957.6.27]

유럽 알프스의 어려운 루트를 많이 오른 오스트리아의 등산가로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에 참가하여 단독으로 첫 정상 정복을 하였다. 그 뒤 초골리사산에 도전하였다가 조난, 사망하였다.
국적 오스트리아
활동분야 등산
출생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주요저서 《8,000m의 위와 아래》

 

인스브루크 출생. 티롤, 돌로미테 등의 산에서 수련하였으며, 유럽 알프스의 어려운 루트를 많이 올라 유명한 등산가가 되었다. 1953년 독일-오스트리아 합동의 낭가파르바트(8,126m) 원정대에 참가, 7월 3일 단독으로 첫 정상 정복에 성공하였다. 1957년 카라코람의 8,000m 되는 봉우리인 브로드산에 도전, 6월 9일 정상을 처음으로 정복하였다. 그 뒤 초골리사산에 도전하였다가, 27일 조난, 사망하였다. 저서로 《8,000m의 위와 아래 Achttausend drüber und drunter》가 있다.

1924년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독일인으로서는 최초로 8,000m급을 단독등정했으며 슈퍼알피니즘의 기수로 지칭된다.

1953년 독일, 오스트리아 합동 낭가파르밧 원정대에 참가하여 고소캠프에서 공격 중 기상악화로

 철수를 명령받자 이를 거부하고 정상공격을 감행해 낭가파르밧을 등정하고 41시간만에 귀환했는데

 극심한 고행으로 출발때에는 29세의 청년의 얼굴이 노인의 얼굴로 변해버렸다.
1957년에는 브르도피크 원정대를 조직하여 소수의 대원전원이 초등하는 개가를 올렸다.
 

1957년에 초골리사의 정상능선을 안개속에서 하산하다 눈처마에서 추락, 사망했다.

 

 

안나푸르나, 에베레스트 등정에 이어 세 번째  8000급 등정이 된 낭가파르밧 을
 1953년 단독으로 초등한 헤르만 불의 자서전입니다.
    
<지은이 소개>   불, 헤르만(Buhl, Hermann. 1924 - 1957),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티롤출신. 등산가. 알프스에서 소년시절부터 등산을 했으며,
1952년  아이거북벽, 1953년 헤르리코퍼 인솔하에 낭가파르파트 등산대 참가 8125m에서 단독으로 공격 초등했으나, 독일과 오스트리아 합동대의 불협화음으로 고통스러워 했음.
1957년 브로드피크(8047m)를 초등하면서 두번째 8천 미터 고봉 등정에 성공하고,    귀국 중 초콜리사에 도전했으나 안개 속에서 추락사 함.
그의 어렸을때 알프스에서의 등산과 등산에 대한 정열을 모은 감동적인 

 

수문출판사(1997년 10월 15일 재판)
헤르만 불 / 김영도 옮김

: 드디어 나는 이 산의 최고 지점에 섰다. 8,125미터의 낭가 파르바트다! 더 오를 곳이 없었다. 주위는 작은, 펀펀한 설면인데 한두 걸음이면 사방이 낭떠러지다. 저녁 7시였다.

지금 여기에 나는 지구가 생긴 이래 인간으로 처음 서있다. 내가 바라던 목표, 그 지점에 서있다. 그러나 마음이 취해서 잠길 행복감도 즐거운 환희도 일어나지 않는다. 승리자로서의 고양된 기분도 없다.

이 순간의 의미를 나는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모두 끝났다는 느낌뿐이었다!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눈위에 쓰러졌다. 마치 훈련이나 했듯이 자기도 모르게 피켈을 바람에 굳은 눈에 밖고, 나는 지금까지 17시간을 견디었다. 걸음마다 싸움이고 말할 수 없는 의지력이 필요했다.

나는 더 이상 위로 오르지 않고 더욱 전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생각하니 그것이 기뻤다.
아직도 멀었나 하며 위를 더 이상 바라보지 않게 됐으니 마음이 놓였다. 나는 아노락에서 티롤 깃발을 꺼내서 피켈을 묶었다. 태양이 머지않아 지평선에 닿으니 서둘러야 했다. 나는 재빨리 사진 몇 장을 찍었다.

나는 무릎을 굽히고 몸을 낮추었다. 전경에는 깃발을 단 피켈이 그리고 배경은 바로 질버자텍과 고원의 일부와 남벽의 낭떠러지가 보였다. 저 밑으로 벌써 저녁 그늘이 길게 뻗고, 질버자텍에는 빈트강게른이 똑똑히 보였다.

캠프 5로 가는 능선도 들어나 보이고
피켈 너머로 멀리 저쪽에 힌두쿠쉬와 카라코룸의 산들이 작고 낮게 바라다 보였다. 카메라의 필름이 다 됐다. 다시 감고 '카라트 36'의 뒷 뚜껑을 조심해서 열었다. 나는 이번 촬영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새로운 '아그파칼라' 필림을 넣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편안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게 됐다. 좁고 펀펀한 정상에서 사방이 급사면을 이루고 무섭게 골짜기까지 낭떠러지다. 사면들은 바로 눈앞에서 사라지고 저 밑의 계곡에 내려가서 비로소 돌에 덮인 빙하가 여러 방향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보일뿐이다. 마치 모든 것 위에서 떠돌며 땅과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없이, 세상과 그리고 인간과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나는 마치 절해의 고도에 있는 느낌이었다.

북녘으로 100킬로미터나 떨어져 웅대한 산군이 떠있다. 동쪽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봉우리들이 바다를 이루고 있는데 이 얼음에 덮이고 아무도 오르거나 가보지 못한 곳 히말라야다. 그러나 이것들은 내가 여기서 바라다 볼 수 있는 웅장한 산군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멀리까지 맑게 개었다. 이것으로 마음이 놓였다. 태양이 산과 산 뒤로 넘어가고 바로 취위가 닥친다. 벌써 30분이 지난 듯하다. 나는 내려가려고 일어섰다......

나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그리고 나는 거기를 떠났다. 그때 또 한 가지 약속이 생각나서 다시 한두 걸음 돌아갔다. 그리고 정상의 돌 하나를 주머니에 넣었다--집에서 걱정하며 기다리는 아내를 위해서다--그리고 어깨를 향해 내려갔다. 그런데 내 몸이 달라진 듯한 느낌이 간다. 갑자기 힘이 났다. 도대체 그 원인이 무엇일까?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일까? 

 

<33> 헤르만 불

2006년 10월 11일(수) 오후 5:24 [한국일보]

"나는 준비했다 결단했다 그리고 하늘에 맡겼다"
원정대가 포기한 순간 홀연히 정상 향해
낭가파르바트 41시간의 처절한 사투… 종교에 가까운 열정으로 거봉 모험
며칠 전 국내 굴지의 한 재벌기업에서 고위직 임원으로 일하고 있는 선배를 만났다. 국내외의 유명 골프장이라면 안 가본 곳이 없을 만큼 골프의 세계에 흠뻑 빠져 있는 사람인데, 언젠가 내가 함께 산에 오르지 않겠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지레 손사래부터 쳐대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니 무엇 때문에 그 험한 곳에 기어오르려고 고생을 해?”나는 세상 사람들을 산에 오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눈다. 산에 오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산 이야기를 해 봤자 소 귀에 경 읽기 일 뿐이다. 그러던 그가 이번에는 술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이렇게 물었다. “혹시 헤르만 불이라고 들어봤어?”나는 목젖으로 넘기던 술에 사래가 걸릴 만큼 놀랐다. 세상에, 산이라면 집 뒤의 야산에도 오르지 않던 사람의 입에서 헤르만 불(1924~1957)의 이름이 튀어나오다니! 하지만 사연을 들어본즉슨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졌다. 자신의 회사에서 임원 재교육의 일환으로 헤르만 불의 자서전 ‘8,000미터의 위와 아래’를 읽게 했다는 것이다.

재벌기업 간부들을 위한 리더십 교육에서 모리스 에르족의 ‘최초의 8,000미터 안나푸르나’를 읽힌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다. 이 책은 마치 소설처럼 쓰여져서 읽기도 수월하고 대단히 드라마틱하다. 하지만 헤르만 불의 자서전이라니? 이 책은 너무 두껍고, 지나치게 전문적이어서, 일반인들에게 권하기에는 조금 망설여지는 책이다.

“처음에는 정말 괴롭더라구. 무슨 책이 생판 처음 들어보는 산 이름들만 줄줄이 나오고 맨날 거기 오르락 내리락 하는 이야기뿐이니 재미도 없고.” 선배는 그러나 술자리가 무르익기도 전에 저 혼자 흥분하여 언성을 높였다. “그런데 중간쯤 읽어가니까 이건 완전히 미치겠는 거야! 우리들이 하고 있는 비즈니스하고 하등 다를 바가 없더라고!”이제 궁금해진 것은 나였다. 도대체 재벌그룹의 고위 간부는 헤르만 불의 삶과 등반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지독한 준비, 과감한 결단, 그리고 진인사대천명!” 솔직히 나는 감탄했다. 등반의 세계에 무지한 그가 헤르만 불의 삶을 단 세 마디로 정확하게 꿰뚫어 내다니! 덕분에 그날 술값은 내가 냈지만 더 없이 유쾌한 술자리였다.

등반의 세계에 무지한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 헤르만 불이다. 그만큼 그가 1953년에 이룩한 낭가파르바트 세계 초등은 유명한 사건이다. 산악사진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꼽히는 것이 그의 초등 직전과 직후의 사진들이다. 초등 직전의 사진 속에 나오는 인물은 29세의 싱싱한 청년이다.

하지만 초등 직후에 찍힌 사진 속의 인물은 거의 노인처럼 보인다. 그가 홀로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마지막 캠프로 돌아오는데 소요된 시간은 정확히 41시간. 그 이틀의 시간 동안 헤르만 불은 인류가 일찍이 체험해보지 못했던 시공간 속을 저 홀로 누비고 다녔다. 그 처절하고 감동적인 기록이 바로 그의 유일한 자서전 ‘8,000미터의 위와 아래’이다.

헤르만 불은 세계 등반사에서 영원히 빛나는 ‘불멸의 스타’다. 그가 인류 최초로 배낭도, 산소통도 모두 집어 던지고 혈혈단신으로 8,000m 급 산의 정상에 올랐다가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대기록이다. 하지만, 선배의 표현에 따르면, 진정 감동스러운 것은 스타가 되기 이전에 그가 쌓아온 ‘지독한 준비’다. 그는 23세가 되기 전에 134개의 봉우리에 올랐다. 그는 남들은 여름철에 오르는 암벽을 눈과 얼음이 뒤덮인 겨울철에 올랐다.

그는 고난도의 봉우리 25개를 33시간 만에 주파했다. 왜 그랬을까? 헤르만 불의 답변은 단순하되 묵직하다. “준비였습니다.” 언젠가 자신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목숨을 걸고 한판승부를 벌여야 할 ‘궁극의 산’을 만날 텐데, 그때를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산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헤르만 불 자신 역시 자기가 ‘무엇’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는지는 몰랐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는 “준비된 사람만이 그 무엇을 해치울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마침내 1953년의 독일-오스트리아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원으로 발탁되었을 때,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준비해왔는지를 섬광처럼 깨달았다고 한다. 당시 그가 남긴 한 마디는 거의 종교적인 경건함마저 느끼게 한다. “나는 준비했습니다. 내 생애는 당신을 만나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내가 아직 당신을 몰랐을 때에도 모든 것은 그 준비였습니다.”헤르만 불은 마치 낭가파르바트에 오르기 위하여 태어나고 살아온 사람처럼 그 산에 올랐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원정대장이 귀환을 명령하고 함께 오를 동반자마저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바로 그 순간, 그는 엄청난 결단을 내린다. 모든 장비들을 ?집어 던지고 저 홀로 정상을 향하여 나아간 것이다. 그는 과연 살아서 내려올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을까? 알 수 없다. 훗날 그는 당시의 결단을 ‘최후의 모험’이라고 명명했다. 그것은 어떤 뜻에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이다. 하지만 그 과감한 결단의 순간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선다면 결코 정상에 이를 수 없다. 헤르만 불은 담담하게 증언한다. “8,000m와 같은 거봉은 사람이 최후의 모험을 다하지 않고 손에 넣을 수가 없습니다.”나는 헤르만 불이 ‘최후의 모험’을 결단하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언제나 전율한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생환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도박이다. 하지만 결단을 못 내리고 돌아선다면 정상은 없다. 그는 그것을 해냈다. 그리고 결단의 순간, 그는 이미 승리한 것이다. 그는 정상에 오르지 못했을 수도 있고, 설사 올랐다 하더라도 살아서 내려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관없다. 지독하게 준비해온 사람이 최후의 결단을 내리고 나면, 이제 남은 것은 신의 몫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나면 이제 하늘의 처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발 밑에 시커먼 지옥… 잠들면 죽는다" 8,000m 정상에 꼿꼿이 선 채 '죽음의 밤'보내헤르만 불이 낭가파르바트의 정상에 선 것은 1953년 7월 3일 오후 7시였다. 간단히 말해서 되돌아오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그는 캄캄한 밤에 저 홀로 하산을 시작한다. 언제나 그렇듯 등정보다 힘든 것이 하산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이젠 한 짝이 등산화에서 벗겨져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사라져버린다. 그에게 남은 장비라고는 이제 등산용 스틱 두 개와 아이젠 한 짝 뿐이다. 정상 부근에는 잠시 궁둥이를 대고 앉아서 쉴만한 공간도 없다.

그는 이 상태에서 꼿꼿이 선채로 비박에 돌입한다. 세계 등반사상 가장 유명한 죽음의 비박이다. 그의 자서전 ‘8,000m의 위와 아래’에는 이 장면에 대한 묘사가 압권이다. 그는 마치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훌쩍 넘어버린 초인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내게는 추위를 막을 비박색도, 추락을 예방해주는 확보용 자일도 없으나, 앞으로 다가올 밤이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했다. 모든 일이 그저 당연하기만 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그는 잠들면 죽는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면서도 깜빡 깜빡 잠이 든다. 그때마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을 확인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한다. “발 밑에는 시커먼 지옥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아직 별이 있었다. 날이 밝지 않았나 보다. 나는 애타는 마음으로 해가 떠오를 지평선에 시선을 던졌다. 마침내 마지막 별도 흐려졌다. 동이 트기 시작했다.”산악문학작가 심산

헤르만 불(Hermann Buhl, 1924~1957)

오스트리아 티롤 출신의 위대한 등산가.

알프스에서 소년시절부터 등산을 했으며, 1952년 아이거 북벽, 1953년 헤르리코퍼 인솔하에 낭가 파르바트 등산대에 참가하여 8,125m 정상까지 단독으로 시도하여 초등했으나, 독일-오스트리아 합동대의 불협화음으로 고통스러워 했다.

1957년 브로드 피크(8,047m)를 두 번째 8,000m봉 초등정에 성공하고, 귀국 중 쵸골리사를 오른 다음, 하산중 눈처마가 무너져 추락사하였다.

<8,000m druber und drunter : 1954>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알프스에서 등산을 시작하며 숨김없이 털어놓고 있는 등산에 대한 정열을 모은 감동적인 자서전적인 기록이다. 이<8,000미터 위와 아래>는 한글로 옮겨져 시판중이며, 그의 낭가파르밧 초등에 관해 영화로도 제작되어 있다.

이 위대한 산악인에 대해 단지 몇 줄의 글로 그의 세계를 논하기엔 너무나 미흡한 점이 많으며, 그의 등반사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1953년 낭가파르밧 정상시도 전의 모습>

 

 

 

<1957년 쵸골리사에서 사라지기 바로 전의 모습과 쵸골리사 전경>

 



"나는 준비했다 결단했다 그리고 하늘에 맡겼다"
원정대가 포기한 순간 홀연히 정상 향해
낭가파르바트 41시간의 처절한 사투… 종교에 가까운 열정으로 거봉 모험

 

 



 

 
불, 헤르만 Buhl, Hermann 1924~1957
오스트리아 티롤 출신의 등산가이며 8000m봉 최초의 단독 초등자이다.
산악도시인 인스브루크에서 출생하여 알프스 전지역의 난벽들을 상대로 등산 수업을 하였다.
그는 강한 의지와 혹독한 훈련을 통해 심신을 단련한 세계적인 등반가다.
그는 힘든 조건만을 골라 겨울철과 야간에 단독등반을 하면서 스스로 냉혹한 채찍질을 하였다.
1947년까지 134개에 이르는 난봉들을 골라 등반했으며, 이중 11개 봉은 초등반을 기록한다.
돌로미테 지역의 최고 난벽 피즈바틸레 북벽을 단독으로 4시간 만에 올라 세인들을 놀라게 했으며, 동부 알프스의 최대 난벽인 표고차 1800m 높이의 와츠만 동벽의 잘츠부르크 루트를 한겨울 밤 시간을 택하여 단독으로 9시간 만에 완등한다.
1953년 2월에 시도된 와츠만 동벽 등반은 낭가파르바트 원정에 앞서 자기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등반이었다.
1952년 여름, 8등을 기록한 아이거 북벽 등반은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당대 유럽의 쟁쟁한 클라이머인 장꾸지, 레뷔파 등과 함께 줄을 묶은 이 등반에서 그는 가장 어려운 구간을 선두에서 리딩하였다.
이때 보여준 등반 솜씨에 대해 이 벽의 초등자인 하러조차도 그를 가리켜 ‘신의 경지에 이른 달인의 솜씨였다’고 극찬하여 당시의 비평가들을 침묵시켰다.
그는 1953년 헤를리히 코퍼(K. H. Herrigkoffer)가 이끄는 독일·오스트리아 합동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에 참가한다.
이 원정대는 1934년 이 산에서 희생된 메르클(W. Merkl)을 추모하기 위해 ‘메르클 추모원정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들은 고소 포터의 부족으로 캠프 설치에 많은 시간을 소요했기 때문에 5캠프를 설치하고 정상 공격을 시작할 때는 몬순이 불어 닥쳤다.
기상이 악화되자 대장은 정상공격을 중지하고 캠프를 철수하라고 지시했으나 다시 기상이 호전되자 불, 에르틀(H. Ertl), 프라운 베르거(W.
Fraunberger), 켐프터(O. Kempter) 등 4명은 대장의 명령에 불복한 채 정상 공격을 결정한다.
5캠프까지 이들과 함께 오른 불이 단독으로 정상 공격에 나섰다.
정상으로 향하던 중 방풍의, 피켈, 카메라만 남기고 나머지 장비는 크레바스에 넣어둔다.
그는 7820m 지점에서 흥분제 두 알을 먹고 드디어 오후 2시 독일, 오스트리아의 숙명의 산 낭가파르바트 정상에 선다.
이후 하산 과정은 너무도 유명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두 차례의 비박을 하고 혈액순환을 돕기 위해 다량의 혈액순환 촉진제를 복용한 그는 환청과 환각상태에 시달리면서 하산길을 재촉한다.
동상에 걸린 발가락이 마비되고, 빈사의 상태로 40여 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면서 가까스로 5캠프에 도착하여 에르틀의 도움을 받는다.
죽음을 극복하고 베이스캠프로 귀환한 그에게 베풀어진 분위기는 너무나 냉랭했다.
퇴각명령을 어기고 등정한 행위가 대장측의 비위를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대장 자신이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동상에 걸린 발가락을 치료해주지도 않았다.
이후 동상 후유증으로 그는 발가락 두 개를 절단한다.
1954년 불은 <8000m의 위와 아래>라는 낭가파르바트 등정기를 출간한다.
그러나 이 등정기는 대장의 사전 동의 없이 발표되었다 하여 헤를리히 코퍼는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다.
이로 인해 불은 오랫동안 심적 고통을 받는다.
원정대 출발에 앞서 대원들은 원정이 끝난 뒤 등반에 관한 글을 발표할 때는 대장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계약서에 서명했기 때문에 대장은 저작에 관한 계약 위반을 빌미로 불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1957년 불은 슈무크(M. Schmuck) 대장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브로드피크(8047m) 원정대에 참가한다.
이 원정대는 대장을 포함하여 4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히말라야 등반 사상 가장 규모가 작은 소규모 원정대로 히말라야에서 알파인 스타일을 최초로 실천한 등반대였다.
이들은 산소용구와 고소 포터를 쓰지 않은 채 전 대원 모두가 6950m 높이의 고소캠프까지 직접 짐을 운반하고, 대원 모두가 등정에 성공한다.
불은 이때 그의 생애에 두 번째로 8000m봉 정상을 등정한다.
이 등반을 끝내고 딤베르거(K. Diemberger)와 초골리사(7668m) 등반을 시도하던 중 짙은 안개와 폭풍설 속에서 철수하면서 눈처마 붕괴로 추락사한다.
저서로는 '8000m Druber und Drunter' (1954), '8000m의 위와 아래' (이종호역·1976·국내발췌 번역판), '8000m의 위와 아래' (김영도 옮김·1996·국내완역판) 등이 있다.
독일의 산 `낭가파르밧'

처절한 도전

비극 이어지고...

1932년부터 독일 산악인들 등정 나서
1934년 10명·1937년 16명 사망 참사


“낭가파르밧은 오직 희생을 요구할 뿐 아무 것도 주지 않는 거인이다.” ­ 헤르만 불.
낭가파르밧은 독일의 산이다.
1856년 독일인 아돌프 슐라킨트바이트가 낭가파르밧 지질학 보고서를 펴내 유럽인들에게 처음으로 소개됐으며, 독일인들이 줄기차게 등정을 시도했던 산이다.


독일은 1932년 이후 20여년간 줄기차게 낭가파르밧 정상 등정을 노렸다. 하지만 낭가파르밧은 쉽게 독일 산악인들에게 정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1934년 독일원정대는 낭가파르밧 원정에서 대원과 셰르파 등 10명이 숨지는 비운을 맛봤다. 그리고 1937년 다시 낭가파르밧을 찾은 독일 산악인들은 해발 6185m에서 눈사태를 맞아 대원 7명을 포함해 셰르파 9명 등 모두 16명이 사망하는 히말라야 원정 사상 최대의 비극이 일어났다.


이 참사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낭가파르밧은 독일인들의 처절한 도전과 비극으로 얼룩진 숙명의 산으로 전 세계 산악계에 인식돼 있다.

◆`벌거벗은 산' 낭가파르밧
낭가파르밧(Nangaparbat)은 해발 8125m(2만6660피트)로 세계 9위봉이다. 약 2500㎞에 달하는 히말라야 산맥 서쪽 끝에 위치한 파키스탄 동북부 펀잡 히말라야에 위치하고 있다.


지리학상 위치는 북위 35도 14분 32초, 동경 74도 35분 40초로 히말라야 8000m 봉우리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있다. 낭가파르밧의 대표적인 벽은 디아미르벽과 루팔벽.


특히 남동벽인 루팔벽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경사도에 길이가 4500m에 달해 난공불락으로 유명하다. 루팔벽은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14좌를 완등한 세계 산악계의 살아있는 전설, 라인홀드 메스너가 1970년 세계 최초로 등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등반에서 라인홀드 메스너는 하산 도중 동생을 잃고 자신은 발가락 6개를 바쳐야 했다. 한국 산악계는 지난 2005년 낭가파르밧 루팔벽을 35년 만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올랐다.


당시 원정대는 100일이 넘는 원정기간을 기록하며 끈질기게 도전, 2005년 7월14일 오후 11시 마침내 루팔벽을 세계 두 번째로 등정했다. 등정자는 지난 5월 에베레스트 등반 도중 숨진 이현조 대원과 지난 20일 K2를 등정한 김창호 대원이었다.

◆히말라야 등반사의 축소판
낭가파르밧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다음으로 세상에 잘 알려진 산이다.
각종 자료와 서적이 에베레스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을 뿐 아니라 인류 최초의 8000m 도전, 최초의 희생자 발생, 최대 인원 사망 등 각종 기록도 갖고 있다.


1895년 영국의 등산가 머메리는 루팔벽 정찰 후 디아미르 측면 약 6000m 지점까지 진출한 후 라키오트 계곡으로 진로를 바꿔 시도하다 실족해 2명의 포터와 함께 행방불명됐다. 등로주의 창시자인 머메리는 결국 낭가파르밧에서 희생된 최초의 산악인으로 기록됐다.


1934년 메르클 대장을 포함한 10명의 대원과 셰르파가 폐렴과 하산 도중 숨졌으며, 1937년 카를로비인 대장을 포함한 7명의 대원, 9명의 셰르파가 라키오트 루트 제4캠프에서 눈사태를 만나 16명이 숨지는 히말라야 최대의 비극으로 남았다.


1938년 바우어가 이끄는 독일팀은 1년 전의 아픔을 딛고 재도전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원정대는 1932년 숨진 메르클 대장의 옷 속에서 벨첸바하의 구조를 요청하는 편지를 발견해 모든 독일인들을 슬픔과 비통에 잠기게 했다.
1939년 아우프슈나이터가 이끈 독일 정찰대는 디아미르 측면에서 2개의 루트로 약 6000m 지점까지 진출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독일의 영웅 `헤르만 불'
독일은 모두 다섯 차례의 도전이 물거품이 되고 뛰어난 등반가와 셰르파 등 26명을 잃었다. 하지만 독일은 물러서지 않았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모두 패하면서 국민들은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독일은 운명의 산이 되어버린 낭가파르밧 등정이야말로 국가의 명운이 걸려 있다고 판단, 1953년 6차 원정대를 파견했다.


원정대장은 1934년 2차 원정 때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페터 아센브레너였다. 대원은 독일인 6명과 오스트리아인 4명 등 합동대였지만 실제는 모두가 게르만 혈통으로 독일인이었다.


독일은 게르만 민족의 순수한 혈통으로 낭가파르밧을 초등해 국민들에게 용기와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해 국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원정대원 가운데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출신 헤르만 불(H. Bull)은 당대 최고의 산악인이었다. 불은 철저한 준비와 과감한 결단력을 갖춘 등산가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 1953년 낭가파르밧 등반을 앞둔 그해 2월 동부 알프스 최대 난벽으로 표고차가 1800m에 달하는 와츠만 동벽을 단독으로 9시간 만에 완등해 산악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낭가파르밧 등반에서도 사전에 모든 것을 준비한 탓에 탁월한 등반실력을 보였다.


특히 등반 도중 영국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다는 소식은 헤르만 불을 정상으로 향하는 의지를 더욱 다지는 계기가 됐다.


1953년 7월3일 오전 2시30분. 독일인들의 염원을 안고 헤르만 불을 비롯해 에르틀, 프라우엔베르거, 켐프터는 정상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기상이 악화되자 원정대장 아센브레너는 캠프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4명의 대원 가운데 불은 대장의 지시를 무시하고 날씨가 호전되자 정상으로 향했다.


불은 해발 7820m에서 흥분제 두 알을 먹고 피켈과 카메라 등 필수품만 챙기고 정상으로 전진했다. 불은 앞으로 어떤 불행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아갔다. 독일의 숙명의 산 낭가파르밧 정상이 점차 가까워졌다.

출처 : 강관호의 산행 기록
글쓴이 : 엄마겟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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