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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리안에서 코리안까지

心中火熱頭腦冷精 2017. 3. 24. 15:36

 

(지금의 서해는 큰 강이 있는 육지였다)

 큰 강의 이름은 한강(漢水)이고, 그 강의 끝 부분에 한라산(漢拏山)이 있다.

한라산이란 한(漢)수를 끌어 당기는(拏) 산(山)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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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2004년 호주 시드니대학 고고학센터 연구보고서에 나오는 그림.
( 동해를 재팬씨라 써논 것만 필자가 동해로 고침)

 

▲ <마고성과 사방분거지> © 천산태백

 

이전시대-----------------------------------------------------선천시대(우주1,2,3,4월)

서기전70,379년~서기전27179년 : 43,200년간-------------마고시대  중천시대(우주5,6,7,8월)

서기전27,179년~서기전7197년 : 20,000년간------------황궁씨 시대 후천시대(우주9,10월)

 

환국시대 때 서해가 육지에서 바다로 바뀌었다. 

 

(지금의 해안선은 8천년전에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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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시대 9부족 분포도> ©천산태백

 

환인천제 7세 계보도 (BCE 7197-BCE3897년)

아담 탄생 B.C 4000년

환웅천황의 시대가 시작되는 초기에 아담이 탄생했다.

환웅천황'(桓雄天皇) '대제국 배달나라'(BC. 3898-2333)

서기전3,897년~서기전2333년 : 1,565년간 단국시대(배달, 박달)

중국 산동성(옛 고조선 강역)에서 은나라 갑골문자 보다 천년(1000년) 더 오래된 문자(골각문자) 발견

                                                   5대 환웅의 마지막 아들 태호복희(B.C 3528~3413)

                                                배달국 소전 장군의 아들 염제신농(BC 3218-3078)

노아의 홍수 B.C 2946년

동시대의 동양 기록에도 9년 홍수가 적혀 있음

14대 자오지(慈烏支) 환웅천황 BC2707 치우천황,

                                                복희와 여와의 둘째 아들 황제헌원 BC(2692∼2592) 황제헌원

                                                동이족 조상 염제 신농씨의 아들 (BC 2414-2514)황제의 후계자 소호금천

唐堯帝(당요제:BC2357-2258) 요임금(부랑아)

2333년 단군왕검(檀君王儉) 고조선 건국. 후천말세(우주10월9일)

虞舜(우순:BC 2255-2208) 순임금(불효자)

아브라함 탄생 B.C 2054년

동양의 신석기 시대에 아브라함이 태어 났다.

2000년 후기 신석기문화 형성. 빗살무늬토기Ⅲ류. 회령 오동유적 제3·4문화층 등 형성.
만주지역 에서 부분적으로 청동기문화 시작.

모세 탄생 1406년

모세율법이 기록되던 때에 동양에도 이미 골각문자가 있었다

1400년 부산 동삼동유적 5층 영도기 형성.

중국 최초문자인 갑골문자(한자의 기원)가 BC1600~중국 고대 상(商·BC 1600~1046년)나라의 수도인 은허(殷墟·허난성 안양현)에서 1899년 처음 발견

1300년 부산 금곡동조개더미유적, 김해 수가리조개더미 제3기 유적 등 형성. 출애굽 B.C 1300년

출애굽 시기 때에 서양과 동양에서 민족들의 이동이 있었다

1200년 동이(東夷)가 은(殷)의 회하(淮河)· 태산(泰山) 일대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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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리 안   -   우리민족의 본래 칭호

 

 

'환인(桓因)'이라는 말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하늘의 신이라는 말인 '하느님'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환웅(桓雄)'시르 다리아 강 출신의 아리아 인(아리안)      '환인의 서자 환웅'

아무 다리아 의 아리아 인은 환인의 적자로,   시르 다리아 강의 아리아 인은 환인의 서자로 지칭.

 

아랄해(Aral Sea)  문명의 시원지(BC 3800년)

 

    
   

윗쪽의 시르다리아강의 아리안들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고조선을 세우고

아랫쪽의 아무다리아강의 아리안들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유럽문명을 이루었다.

 

아시아의 주요 지리
알타이 산맥
 

알타이어계 종족들과 경계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들과의 충돌이 심했다.

우랄어족알타이어계와 함께 더욱 큰 어족을 형성한다고 가정했을 경우의 총괄적 명칭이 우랄-알타이어계이다.

알타이산맥은 중국 신장성과 몽고의 국경으로부터 러시아령까지 동서로 이어진 산맥입니다.   평균 높이 1300미터, 길이 1500 킬로미터나 되는 산맥입니다.   이 알타이 산맥 동쪽의 어군이 알타이어계이고 서쪽의 어군이 우랄어계입니다.   우리 나라는 이 산맥의 동쪽 끝에 있습니다.

우랄어와 알타이어는 둘 다 교착어입니다.   교착어[膠着語]란 언어 형태 유형 하나.   어떤 독립성 없는 조사 접사() 따위 붙여 기능 의하여 문법적 관계 나타내는 언어 이른다.

우랄어 핀란드어, 헝가리어 등의 일부 유럽어와 시베리아에 분포하는 여러 언어를 포함합니다.   이들은 지역적으로는 유럽에 가까우나 언어의 형태상으로는 인도ㅡ유럽어족과 관계가 없고, 오히려 알타이어와 비슷한 점이 있어 우랄 ㅡ알타이어로 묶은 것입니다.

알타이어계 동으로는 일본, 서로는 터어키에 이르는 지방의 어군입니다. 한국어 터어키어,몽고어, 만주어,일본어 등이 이에 속합니다. 알타이어계의 언어들은 발음이나 문법상의 공통점이 꽤 많으나 어휘의 차이가 심하여, 일부에서는 같은 어족으로 분류한다는 건 무리라고 하기도 합니다.

인도-유럽 어족 세계 어족 하나.   역사 시대 이후 인도에서 유럽 걸친 지역 널리 퍼져 있던 언어 통틀어 이르는 이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 , 이탈리아 , 러시아 , 에스파냐 현재 유럽 거의 모든 언어 이에 속한다.

고조선을 건국한 종족은 아랄해 윗쪽의 시르다리아강 출신의 아리아 인(아리안)이고, 그들의 언어가 한국어의 한 뿌리가 되었다.   '단군(檀君)'은 다곤(Dagon)과 어원이 같다.

다곤 신 : 풍작의 신으로 고대 근동지방에서 널리 숭배했다.   Dagan은 히브리어와 우가리트어에서 '곡식'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였으며, 다곤 신은 쟁기를 발명한 전설상의 신이었다.   일찍이 BC 2500년경부터 이미 다곤 신을 숭배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고, 라스샴라(고대 우가리트)에서 발견된 문헌에 따르면 다곤은 바알 신의 아버지였다.   라스샴라에 다곤 신을 모시는 중요한 신전이 있었고, 특히 다곤이 필리스틴 사람들의 신으로 알려져 있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아셀의 벳다곤(여호 19:27), 가자(판관기 16:23), 아스돗(Ⅰ 사무 5:2~7)을 비롯한 여러 곳에 다곤의 신당이 있었다.   라스샴라에서는 분명 최고신인 '엘'(El)뒤이어 2번째로 중요한 신이었지만, 풍요의 신으로서 농사를 풍작으로 이끌어 주는 기능은 BC 1500년경에 바알 신에게 넘어간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桓國]으로 이동한 환웅의 무리(아리안)와   영국으로 이동한 아리아 인(아리안)이 같은 언어권에서 제일 먼저 이동.

'조선(朝鮮)'의 뜻은 '좋은 태양 [joy sun]'이다.

아리아 인들이 세계로 이동하여 세운 나라들의 국명이나 도읍지의 명칭에는 당시의 종교와 철학이 담겨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리랑들이 문명전파를 위해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일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또 돌아온다는 보장 자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길을 떠났으므로 그 때의 심정이 담긴 노래인 아리랑은 다 슬픈 내용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돌아 온 이가 거의 없고 자신들이 문명을 이룬 그곳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아라안들이 이루어낸 문명이 세계 각 처의 원조문명들이다.

우리 이런 사람이야 !   알긴 알어!    그런데 그 위대한 조상을 둔 한국인들의 현재 꼬라지하고는 참 귀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눈뜨고 하늘을 볼 수가 없을 지경이다.

[아리안들의 진출 루트]

[시르다리아강 출신 아리안들에 의해 이루어진 문명들]

 

고대한국의 개가 세계로 퍼졌다.

 개는 혼자 가지 않는다.  사람이 데리고 가는 것이 개.

개의 기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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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주요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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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로(읍루)는 어떤 나라였는가.

  『대청일통지』에 승덕현(承悳縣)은 진 이전은 숙신씨의 영토였으며, 한 진 당초(漢晉訖唐)까지 압로국(읍루국)에 속하였다.    예종 때에 발해 대씨에 속하였다고 한다(秦以前肅愼氏地 漢晉訖唐屬挹婁國 睿宗時渤海大氏 - 대청일통지 권 38 승덕현조 세주) 그렇다면 압로(읍루)가 한, 진, 당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리 발해 전성기의 땅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고 기록은 말하고 있다.   왕조로서의 압로(읍루)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지금의 허베이성에서 랴오닝성은 고조선의 성지(聖地)이다.   홍산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하며, 고구리의 광개토대왕이 후연을 치고 식민지를 만든 곳이기도 하다.   이런 말을 하면 정신병자 취급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도 안다.   개의치 않겠다.   또 압로(읍루)는 옆의 지도에서처럼 연해주에 걸치어 살았다고 배웠다.

    

또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동부여 등 우리 겨레들과 말이 다르다고 기록해 두었다.   압로(읍루)가 허베이성 북부에서 한 진 당초(BCE 1세기~CE8세기)까지 살면서 거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다는 사실은 까맣게 몰랐다.   이 모두가 식민사관 때문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북방민족들   :  [흉노,  거란,  선비,  여진, 몽골] (동이족)

     북방민족들은 동쪽으로 이동한 시르다리아강 출신 아리안의 후예들이다.   시르다리아강 출신 중 주 세력은 환인과 환웅과 단군으로 이어지는 고조선족이다.   중국의 한(漢)족은 5대 환웅시대 때부터 갈라져 나간 무리들이다.

     북방민족의 첫번째 주자인 BC.3세기 경에 등장한 흉노는 B.C 48년 경에 동서로 갈라지며 서흉노의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하고 동흉노는 후에 다시 남북으로 갈라져 남흉노는 후에 선비족에 흡수되고 북흉노의 일부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유럽으로 진출한 훈족으로 활동한다.

     북방민족의 두번째 주자는 흉노가 강성한 시기에 동북삼성에 살고 있던 미미한 부족이던 선비족이다.  선비족은 1세기 중엽(AD 22~55년 사이) 탁발선비의 수장인 추인(推寅)이 부족을 이끌고 알선동 동굴에서 출발하여 초원으로 이동한다.   선비족은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를 세운 민족이다.

     북방민족의 세번째 주자는 거란이다.   거란은 왕조의 역사만 따져도 915년부터 1125년까지 211년 동안 북중국의 패권을 휘둘렀다.   거란은 후에 요(遼)나라를 세운 민족이며 동아시아 최초의 정복왕조입니다.      

 

     역사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탁발선비의 북위가 기원 389년 군대를 일으켜, 동호(東胡)의 후예인 선비족 가운데 유연부(柔然部)를 정벌합니다.   이 강력한 북위의 군대에 패한 유연의 일파북유연으로서 흑룡강성 북쪽으로 밀려나 훗날 몽골의 선조가 되는 스웨이(室韋 shiwei 실위)가 됐습니다.  (이 스웨이란 말이 바로 오늘날의 시베리아(Siberia)의 어원이라는 걸 혹시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또 다른 일파는 남유연으로서, 시라무룬허와 라오하허 사이의 지역에 정착하여 유목과 수렵으로 생활하면서 8개 부락을 구성하여 살았는데, 이들이 바로 훗날의 거란족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거란은 선비족의 일파였고, 몽골 역시 선비족의 일파였으니 선비-거란-몽골이 모두 넓게 보아 한 핏줄 - 북방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흉 노]

     흉노 현재 전해오는 기록상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대략 BC. 3세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로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이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는지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별안간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이미 북방의 초원에서 살고 있었고, 그들 나름대로 갈등과 통합을 반복하면서, 기마문화와 철기문화를 발전시키오고 있었지요.   단지 <별안간 나타났다>는 것은 현재 남아 있는 <중국측의 기록만을 모아놓고 보니까 기록상에서는 "별안간"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흉노는 누구의 후손이고 그들의 후손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 민족의 혈연적인 맥을 확인해보는 것인데, 이건 불분명합니다.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어느 하나의 주장이 독보적으로 논증 내지 고증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들의 주된 근거지가 오르도스 지역과 몽골고원이었고, 

    훗날 .......

(1)일파가 서쪽으로 이동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쪽으로 갔으니 그게 바로 <훈(Hun)족>이고,

(2)다른 일파(남흉노)는 중원에 합쳐져서 <한족의 일부>가 됐고,

(3)또 다른 일파는 동쪽에서 이동해오던 <선비(鮮卑)족에 합쳐>북위를 건국해 북중국을 통일한 다음, 그 북위가 다시 버전업이

    되면서 중국 최초의 국제국가인 수. 당(隋. 唐)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흉노의 혈통에 대해 어느 학자들은 흉노-선비-거란-몽골-여진(만주족) 등을 우리의 선조와 합쳐서 <북방민족>으로 크게 구분하여, 크게 보면 같은 민족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다른 학자들은 흉노-돌궐-위구르-키르키스 등은 일괄해서 늑대를 토템으로 하는 [투르크(突厥)계], 선비-거란-몽골-여진은 하늘의 아들(天孫)을 자처하는 [몽골계]로 나누기도 합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 역사를 <북방>과 <남방>이라는 두 요소가 갈등-교류를 해온 것으로 보기도 하고, 다른 견해에서는 <몽골계>와 <투르크계> <중원-한족계>의 세 요소가 삼자간에 밀고 당기고 갈등-교류하면서 전개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물론 중국의 입장에서는 <중원의 중국>과 <사방의 주변민족>이라는 자기 중심적 구도로 설정해서 보기도 합니다.

 

     앞의 두 가지 견해는 <유라시아의 초원에 활동하던 유목민>의 역할과 비중에 새롭게 주목하는 견해이고, 후자의 견해 즉 <중국과 주변민족>이라는 구도는 전형적인 중화주의적 시각이 되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저같은 길가던 행인이 뭔가 주장하거나 그걸 논증할 능력은 전혀 없고, 단지 중앙아시아-몽골고원-만주로 이어지는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북방민족이라고 넓게 이해하면 되겠다 싶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은 우리와 또는 우리 선조와, 적어도 혈연적 사촌관계였거나,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기질과 문화에 유사성이 많은 이웃사촌이었다는 것입니다. 

                      

[선 비] -> 수나라 - 당나라

     중원의 희망으로 보이던 유복한 황실의 행운의 황제 한무제(漢武帝)는, 전쟁광이라는 몽유병에 빠진 채, 유방을 비롯한 조상들이 피땀으로 일궈서 물려준 엄청난 국력과 수백년에 걸쳐 이뤄온 중원의 문명을 40년만에 거덜내 버렸습니다.   그 결과 한나라는, 제자백가를 통해 발전된 문명을 스스로 깨뜨리고는, 문명 쇠락과 정치의 퇴행과 경제적 파멸로 빠져갔고, 그 많은 백성들은 엄청난 무게의 고통 속에 허덕이면서 죽어갔습니다.   그나마 왕망과 조조, 두번에 걸치 개혁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진(晉)이라는 종착역에 가서는 <광란의 자해극>으로 몰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수백년에 걸친 이 양자 공멸(共滅)의 역주행을 누군가 일관되게 보고 있었다면, 이제 전면전은 그만, NO WAR~! 를 외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거기에 조응하여 그렇다는 답을 했을 것입니다.   흉노든 중원이든 그 답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을 터이나, 새로운 시대정신을 주장하고, 상대방을 설득시키거나 타협하고, 그것의 구체적인 방책을 세워 실현할 수 있는 역사적 임무는, 결코 이들에게 주어질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담당자, 새로운 주체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새로운 세력이, 바로 선비족이었습니다.   이들은 북방과 장성 이남 곧 호(胡)와 한(漢)을 하나로 융합하라는 시대적 요구를 스스로 깨우쳐냈고, 그들은 새로운 에너지로 이 시대를 이끌어갔습니다.   결코 수월한 과정이 아니었지만, 자신을 버리고 온몸을 던져 호한융합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구현해냈습니다.   그들은 저 멀리 대흥안령 산맥에서 초라하게 출발했으나, 흉노의 강역-몽골 고원으로 들어오면서 점차 돌풍의 에너지를 축적했습니다.   계속 남하하여 진(晉)이 망하고 퇴출당한 거대한 역사의 진공 속에서 <오호십육국 시대>라는 본선 무대에 참여했고, <북위(北魏)>를 세워 북중국을 통일하여 돌풍의 에너지를 역사의 추동력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결국 선비족은, <북조>와 <수(隋)>라는 길지 않은 변신 과정을 거쳐 동아시아 남북을 통일하고는, <동아시아 최초의 거대한 국제국가 당(唐)>을 세워 거대한 역사의 진보를 이뤄냈습니다.   당(唐)은 북방과 정성 이남을 개방적으로 통합하고 그 이절적 문화를 한데 끓여내 융합했고, 개방과 진보라는 시대적 요구를 체현하여 세계의 모든 길이 장안으로 향할 수 있게 했습니다.   7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는 당나라는 이전의 남북이 갈려져 있던 시대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북방의 사람들은 아예 주체세력으로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동쪽으로는 일본과 신라 백제 고구려에서 인재가 몰려들었습니다.

 

     서쪽에서는 중앙아시아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저 넓은 유라시아에서 외국인들이 몰려들었고, 그 가운데 적지 않은 외국인들이 아예 눌러 앉곤 했습니다.   남쪽으로는 엄청난 경재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사상과 문학이 발전했고, 종교가 꽃을 피웠고, 원거리 교역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누구나 찾아오고 누구나 참여했습니다.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국가인 당나라>는, 바로 <선비족의 나라>였습니다.   호합융합이라는 시대이념을 구현한 이 당나라는, 한족의 나라가 아닙니다. 중원의 국가도, 소심한 중국도 아니었습니다.

 

[거 란] -> 요나라

1. 거란족 성립

     거란 혹은 계단으로 적히며, 본 발음은 키타이(kitai)이다고구려 서쪽 지역의 대릉하 유역 근처에 거주한 유목민족으로, 말갈과 함께 고구려를 구성한 중요 축이었다이들은 고구려에서 유인으로 분류되어 세금 감면혜택을 받았고, 고구려의 중요한 군사자원이었다고구려 후기 당나라에 일부가 복속되고 고구려 멸망 후 거란 전체가 완전한 독립을 하였다.

2.거란족사회문화

   유목민족으로 특징될만한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평가와 가치는없었음

3.건국한 나라

    요나라()는 거란족이 세운 중국의 왕조(907-1126).  초대 황제는 야율아보기이다.

   907년 야율아보기가 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요나라를 세웠고 발해를 멸망시켰다. 자신들이 진정한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명분으로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서희의 담판으로 물러갔다.

     서요(중국어 간체: 西辽, 정체: 西遼, 병음: Xī Liaó, 거란어: 카라키타이)1132년부터 1211년까지 투르키스탄에 존재한 나라였다. 1125년에 금나라에 멸망된 요나라의 황족인 야율대석이 서쪽에서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서요라고 불린다. 이슬람 사료에서는 "카라키타이"라고 불린다. 수도는 키르기스스탄 토크모크의 부근이었다.

4.요나라 사회 문화

    거란문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요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대체로 한족에 동화되었고,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하였다. 서요(카라키타이)는 중앙아시아쪽으로 흩어졌다이 과정에 중국한족의 영향으로 문화적 유산이나 역사적 평가가 없음.  거란 문자는 거란의 요 태조가 만든 문자로, 한자를 토대로 만들었다거란문자는 1970년대 들어서 많이 연구되기 시작하였으나, 지금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표음문자라고 한다.

 

[여 진] -> 금나라 - 청나라

 

     여진족은 동부 만주(滿洲)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이다.   여직(女直)이라고도 한다.   이 민족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肅愼), ()나라 때는 읍루(挹婁),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勿吉), () ·()나라 때는 말갈(靺鞨)로 불리었다.   10세기 초 송나라 때 처음으로 여진이라 하여 명나라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나, 청나라 때는 만주족(1635, 청의 2대황제 '홍타이지'가 공식적으로 여진족을 만주족이라고 개명)이라고 불렀다.

 

     여진족이 세운 나라 - 1115년 금()나라, 1616년 후금(1636년 청으로 개명) 건국

 

    선비족이 세운 수나라, 당나라,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청나라,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는 중국 한족의 정권이 아니다.   중국 한족은 고조선을 섬기던 족속이요, 북방민족들에게 짖밟히던 민족이요, 겨우 내세울만한 정권이라야 대륙의 중부를 통일했던 진시황 정권인데, 넉넉 잡아 15년만에 망했다.  지금 대륙을 차지하고는 있으나 역사적 명분이 없어 아직까지도 명분을 세워볼려고 사부작 응큼 철판에 별 짓을 다하고 있다.   한족 중심의 현 정권은 6.25 때 억지로 티벳을 힘으로 속박하고 야비한 술책으로 몽고역사를 강도질하였으며 이제 한국역사를 강도질 하려고 동북공정을 사부작 사부작 하다가 요즘에는 얼굴에 철판깔고 들이대고 있다.   일본놈들이 괜히 중국에 들이대는 것이 아니다.   일본과 중국의 다툼은 똥 묻은 놈하고 재  묻은 놈하고의 서로 잘났다고 하는 격이다.   1,2차 세계대전 끝에 불량한 자들에 의해 형성된 오늘날의 국경들은 사사건건 힘의 논리 외에 통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원자폭탄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 난리법석들이다.

 

훈 족 = 한()족   우리와 같은 시르다리아강 출신의 일족

흉노족의 일족인  훈족,  그리고 훈나라의  "훈"은  "한(桓)"의 방언이다.

   ※ 한국과 몽골은 을  "한, 간, 가안, 가한, 칸" 등으로 썼다.   이 "한"은 민족의 이동과 지역적인 방언으로 수메르는 "안", 흉노는 "훈", 중국은 "군"이 되었다.

 

훈족의 강역

아틸라의 최대 판도 (434-453)

그림을 보면 훈족의 활동영역은 자기 선조나라인 환국의 영역에서 유럽쪽으로 더 확장시켰다.

 

     훈누...흉로...모두 로(노)나라"란 뜻이며... 고대 노(魯)"나라를 이르며...후, 휴...는...하(夏)"나라를 이릅니다.   정확히 말해선 훈로"를...중원 남부가 지들 멋대로 한자 국명을 멕인 겁니다.    훈노,,,흉로,,,노나라...이게 다 (堯)에 기원하고...(遼)"를 뜻하는 겁니다.    예맥, 동예의 "(穢,醴)"도 이 (례)에 기인한다 봅니다.

 

      독일 ZDF 방송에서 제작한 스핑크스, 역사의 비밀에서 독일 연출가인 옌스 페터 베렌트와 미국의 코넬 대학 교수인 아이케 슈미트 박사가 훈족을 집중적으로 추적하면서 한반도 남단인 목곽적석 신라고분군에서 발굴되는 많은 유물을 검토한 후 내린 결론은 훈족이 아시아 최동쪽인 한반도에서 출발 했을지도 모른다고 결론을 내렸다.   미국에서 제작된 훈족 다큐 Atilla, The king of Babarian 은 메모해둔 자료가 없어져 다큐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잊어버렸지만 기억에 남은 그들은 중국과 미국의 역사학자들이었다.

     두 편의 다큐를 비교해 보면, 독일 ZDF 방송에서 제작한 다큐는 철저하게 유물 고증으로 훈족의 출발지가 한반도 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증을 해가면서 밝힌 반면, 1997년 방영된 미국에서 제작한 훈족 다큐는 첫번째 화면에 한반도 지도가 나오면서 붉은 화살표가 한반도에서 만주 벌판으로 뻗어 올라가며 훈족의 출발지를 한반도 본토로 기정사실화 하면서 훈족은 한반도 깊숙한 본토에서 출발했다는 설명이 이어지는 TV 화면을 보면서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다큐는 나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어서 다큐를 본 후 나는 훈족의 자료를 찾아 오늘 이 시간까지 책과 인터넷에서 훈족의 자료를 수집하는 계기가 되였다.

 

     훈족(흉노)이 서유럽으로 이동을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중앙아시아와 극동지방에 있었던 천재지변이었다.   4 세기 초엽부터 5년간 기온이 1도가 내려가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에게 생명과도 같은 풀과 농작물이 냉해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목민인 훈(흉노)족은 자연재해를 피하기 위해 만주를 거처 중앙아시아 초원을 따라 한반도 깊숙한 본토로 부터 대이동을 시작해 만주를 거처 초원을 따라 북상해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4세기 초 무렵, 극동아시아에서는 수년동안 기온이 평시보다 떨어지는 이상기온현상이 발생하였는데, 그로 인해 곡식은 영글지 못하고 동물들에게 풀을 뜯어먹일 수 있는 땅은 부족하였다.

아틸라는 453년에 독일공주 Ideco와 결혼을 하였으나 첫날밤에 비명횡사했다.

      유럽에 진출한 훈에 대한 기록은 로마인들이 많이 남겼으며, 그 기록 중에서 훈족은 네모진 얼굴에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납작한 코, 옆으로 가늘게 쭉 찢어진 눈, 이마에 편두를 한 작달막한 사람들로 로마인들에게 혐오감을 주었던 이들은 분명 유럽으로 진출한 아리안족(한민족의 한 줄기)인 백인과는 거리가 먼 중앙아시아와 몽골 초원에 살던 아리안족인 몽골계 유목민족(한민족의 한 줄기)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은 유럽과 중근동을 지배하던 대제국 로마와 싸워 그들을 괴롭히며 로마로 부터 조공을 받아내면서 활동영역을 서유럽까지 넓혀 갔다.   이들과 끝임 없는 전쟁을 치루며 조공으로 국력을 잃은 서로마는 끝내 침입해온 게르만족에게 힘없이 멸망했다.   이들의 일부가 스키타이족으로 불렸다.

     서기 370년경 이 방랑민들은 로마제국 국경선에 도착하여 다뉴브 강(독일 남서부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흘러 흑해로 들어감; 독일명 '도나우강')을 따라 현재는 헝가리 지역인 대초원위에 그들의 왕국을 세웠다.    헝가리는 훈족의나라 라는 뜻이다.

한국과 헝가리의 유사성

     유럽인은 주로 백인종이고, 전혀 문외한인 경우는 아예 모두가 백인인 것으로 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에서도 북유럽의 핀란드와 동유럽의 헝가리는 원래 황인종입니다.   물론 유럽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 끝없이 전쟁, 지배와 복속관계 등이 형성되고 국경도 끊임없이 변해온 까닭에 혼혈이 많이 되어 아시아계라 할지라도 이제는 거의 유럽인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언어적으로 그들은 아시아계 본래의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헝가리(마자르) 사람의 이름은 우리처럼 성을 앞에 씁니다.   그들은 우랄어족에 속하죠.    헝가리는 스파이스 루트에서 유럽에 고추를 전래해준 나라, 고추축제가 열리는 나라 그리고 유럽인중에 유일하게 회를 즐겨 먹는다고 합니다.

 

터키와는 형제국

http://blog.naver.com/jang4852?Redirect=Log&logNo=40065270303

 

     터키에서는 위구르를 포함한 오스만 제국때의 형제국들과 그리고 홍산문명에서 파생된 동쪽의 몽골, 만주, 한국, 일본, 서쪽의 오스만 제국 나라들을 같은 뿌리로 보고 형제국이라고 역사에서 가르치고 있다.

 

    기원전 2세기경 흉노제국한무제에 의해 붕괴된 이후 흉노는 여러 부족으로 흩어지는데 (같은 시기에 우리의 고조선도 한무제에 의해 망하는 게 눈에 띈다... 고조선도 흉노와 밀접한 관계였을까?)   그중에 투르크족, 즉 돌궐인들의 부족들이 오늘날 중앙 아시아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이들이 유연을 멸망시키고 돌궐제국을 만든 때를 현대 터어키인들도 자기 민족의 본격적인 출발로 믿고 있다.

 

    실제로 중앙아시아의 돌궐제국의 수도 터에는 돌궐문자의 비와 유적들이 지금도 남아있어서 많은 터어키 학자들의 조상 캐기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한다.   이 돌궐 제국은 흉노제국이 없는 공백을 메꾸면서 중국과 대결하는데, 그 시기는 대략 6-7 세기, 즉 우리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과 대결하던 때와 일치한다고 한다.

 

    돌궐의 중국 공격은 이전 흉노제국의 그것보다도 더 집요하고 강력하여 당나라조차도 그들에게 당하지 못하여 여러번 불평등조약을 맺고 있다.   특히 측천무후 이후 당나라에 의해 돌궐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그 유민들이 계속 남아서 끈질기게 저항하는데, 이 시기는 묘하게도 우리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가 들어서고 통일신라가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는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즉 돌궐의 당나라에 대한 끈질긴 견제 때문에 당나라는 한반도의 발해와 통일신라에 대하여 제대로 신경을 쓸 수 없었다는 것이다.   라당 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한 이유가 여기에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조상들은 뜻하지 않은 도움을 돌궐 들에게서 얻었던 셈이다. 

 

    현대 터어키인들은 흉노가 망한후 그 유민들이 갈라져 서쪽으로 가서 돌궐인들이 되었고, 동쪽으로 간 지파는 한민족이 된 것으로 믿고 있다 한다.

 

스키타이족    훈족에서 갈라진 일족이며 대월지국에 합류

 

    기원전 제2천년기말에 볼가강의 한  인도유럽어족은 수레를 끌고 자신들의 땅을 떠나 시베리아 땅으로 올라가 예니세이강까지 갔다.   북쪽과 동쪽으로 카스피해를 돌아 이란까지 내려가 거기에서 키메르족이라는 이름을 얻고, 그 다음에는 사카족(석가모니 종족)으로 불리다가, 기원전 7세기에 마침내 스키타이족이 되었다.   한국어도 인도유럽어족의 언어 가운데 하나이다.   유럽인들은 그들을 "훈족(Huns)"이라고 불렀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는 그들을 스키타이인(Scythians)이라고 기록했으며 그뒤의 유럽인들은 그들을 몽골인이라고 불렀다.

 

1. 스키타이 명칭

SKYTAI는 SKYTHIA지방에 살고있는 주민을 말한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BC 5세기경 흑해지방을 답사하고 그곳에 살고 있던 주민을 ‘스키트인’이라고 기록하였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스키타이인은 이란어를 쓰는 유목민으로 BC 8세기 흑해북안에 이주해온 사람들로서 페르시아인들은 이들을 사카라 부르고 있어 대개 총칭하여 스키타이, 사카족(석가족=석씨족)이라 불린다.

 

2. 스키타이 활동지역

스키타이 문화는 BC 7세기~BC 3세기에 흑해북쪽 초원지대를 중심으로 성립된 기마유목민족문화를 말하며 드네프르강 하류 니콜폴 근방이 스키타이 왕국의 정치, 경제 중심지였다.   그러나 스키타이의 특징적인 문화요소들이 흑해북안,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미누신스크 분지, 알타이, 북방오르도스 지역까지 북방유라시아 거의 전역에 걸쳐 확인되고 있어 이 지역을 ‘스키타이 세계, 先흉노-스키타이 세계’라 부른다.

스키타이 세계에는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문화, 볼가-우랄강 유역의 사브라마트 문화, 중아아시아의 사카문화, 시베리아 미누신스크 분지의 타가르 문화, 알타이 파지릭 문화, 서몽고의 울람곰 문화, 오르도스의 모경구 문화 등이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스키타이 문화 요소를 지니는 고고학문화들이 삼림지대와 산악지대를 따라 다수 알려져 있다.

▲ 스텝지대와 스키타이 세계(전시 도록 『스키타이 황금』, 1991) ⓒ프레시안


3. 스키타이 종족 구성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스키타이는 대체로 네 개 종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한다.   이들이 농경스키타이, 농업스키타이, 유목스키타이, 왕족스키타이들이다.   농경스키타이와 농업스키타이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순수한 스키타이가 아니고, 스키타이에 의해 정복된 원주민인 것 같다고 한다.   스키타이는 유목스키타이라고 해야 하나 그 중에서 지배적 지위였던 것이 왕족스키타이로 그들은 가장 용감하고 수도 많고 타의 스키타이를 자기의 노예로 간주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들을 스키타이라 부른다 해도 네 집단이 동일 인종에 속하고 공동기원을 갖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종합해보면 그리스 관점에서 그리스 밖의 유목지역-왕족스키타이의 지배 아래 있던 지역을 통칭해서 스키타이로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키타이가 인도 유럽어족인 이란계 인종이라 말할 때 이들은 흑해주변 지역의 원래의 토착민(동쪽에서 이주해온 스키타이에 의해 정복된 이들)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4. 스키타이의 기원

  스키타이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기원 문제는 남러시아토착민설과 아시아에서 침입해왔다는 외래기원설이 있다.   헤로도토스 자신도 『역사』저서 속에서 가장 믿고 싶다고 한 것은 스키타이는 기원전 7세기 말에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침입해 왔다는 설이다.

“스키타이인은 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유목민이었으나 맛사게티아인과의 싸움에 져서 압박을 받아, 볼가강 건너 긴메리아人 나라로 향하여 퇴거한 것이다.   스키타이인이 몰려움에 긴메리아인은 왕족과 민중의 의견이 분열되었다.   즉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왕족의 견해와 퇴거해야 한다는 민중의 견해가 있었으나, 긴메리아인은 결국 싸우지 않고 스키타이에 땅을 넘겨주었다.”

“지금도 스키타이에는 긴메리아 성벽, 긴메리아 나루터, 긴메리아라는 지방도 있고, 긴메리아 해협도 있다.   또 스키타이인이 그들을 추적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 메디아 영토에 침입한 일도 확인할 수 있다…….”

스키타이에 대한 앗시리아왕 연대기의 기록, 이란 서북부 지베의 발굴자료, Caucasus 우랄왕국 발굴자료 등을 통해서도 아시아 진출설은 신빙성이 있는 언급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스키타이 종족 중 서쪽의 흑해지방의 농업에 적합한 지역의 스키타이는 농업문화 속에서 생활하였고 분묘도 토장묘임에 비하여 동쪽의 초원지대의 스키타이는 유목문화 속에서 생활하였고 적석묘를 남겼다.   이들은 분명히 그 기원을 달리 한다고 보아야 하며 유목스키타이는 중앙아시아쪽으로부터 이동해온 우랄-알타이 어족인 것이다.   스키타이 네 종족 중 왕족 스키타이가 동쪽에 위치해 있고 지배적인 지위였다는 것이야말로 많은 학자들의 아시아 기원설을 뒷받침해 준다.   알타이 주민인 Agrippaioi가 동유럽으로 분리해와 왕족스키타이를 세웠다는 헤로도트스의 기사도 있다.   토착민설에 대해서는 문헌사료가 제시될 수 없는 실정이다.

 

5. 스키타이의 역사적 흐름

연대

스키타이

사르마티아

BC 9세기 초

서부이란으로 들어온다.

 

BC 7세기 경

스키타이는 아시아에서 이동한 뒤 이미 카프카스와 흑해 북부평원을 점령하고 있던 킴메르족의 영토를 침범하게 되었다.   30년 동안 계속된 전쟁을 통해서 이들은 킴메르족을 정복하고, 페르시아 서부에서 시리아와 유대 땅을 지나 이집트 경계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페르시아를 지배하던 메디아인이 이들을 공격, 아나톨리아 지방으로부터 몰아냈기 때문에 이들의 영토는 페르시아 경계지역과 쿠반을 거쳐 러시아 남부까지로 축소되었다.

 

BC 513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이 침범했으나 충분히 격퇴하였다.

 

BC 339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와 전투를 벌이던 중 스키타이의 왕 아테아스가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BC 5세기경 사르마티아인은 우랄산맥과 돈강 사이의 지역을 지배했다.

BC 4~2세기

스키타이는 같은 유목민인 사르마티아인에게 흡수된다.

BC 2세기에 멸망하는데 마지막 왕은 팔라쿠스였다.

한나라 세력 확장기간에 서쪽으로 이주해온 월씨족이 아프가니스탄지방의 원주민과 연합하여 대월씨(BC4세기~AD1세기)를 형성하였을 때 그곳에 있던 스키타이인들도 그 치하로 통합된다.

BC 4세기에 그들은 돈 강을 건너 스키타이인을 정복했으며 이들을 대신해 BC 2세기에는 러시아 남부의 거의 전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사르마티아인은 몇 세기 동안 다키아(루마니아)와 도나우강 하류 유역을 침력했으나 3세기경 오히려 고트족에게 정복되었으며 부족민 대다수가 고트족의 서부유럽 침략에 동참했다.

사르마티아인은 370년 이후 훈족이 러시아 남부지역으로 이주한 뒤 멸망했다.   생존자들은 다른 민족에게 동화되거나 서부유럽으로 도망쳐서 훈족과 고트족의 생존자들과 계속 전쟁을 벌였다.   6세기경 이들의 후손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스키타이 =

 

 

    6. 유물로 보는 스키타이와 신라의 연관성

    아프가니스탄 틸리아 테페(Tillya Tepe)에서 발견된 금관은 신라 금관과 유사하다.   이 시리아․테베 유적의 연대는 대월지 시대에서 쿠샨시대 초, BC1c~ AD1c경 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금관(틸리아 테페) ⓒ김운회 신라 금관(5~6세기)

 

수목형 솟은장식과 머리띠형 다이아뎀에 붙여진 꽃모양 장식은 신라 왕관과 다르지만, 다이아뎀에 수목형 솟은장식과 작은 원형의 금제 달개를 매단 형식은 똑같다.   발굴 보고자는 관내부에서 발견되 성스러운 결혼을 부조한 황금장식판과 금알갱이로 세공한 목걸이와 날개 달린 아프로디테상들으로 보아 스키타이 여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 5, 6세기 금관과 이 여왕의 수목형 금관의 연대차는 4,5백년 정도이지만, 간접적이었을지라도 이것이 원류였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시리아-테베의 금관과 로마유리는 신라문화가 그처럼 오래전부터 스키타이인과 관련 있었고, 그후에도 소중하게 유지하여 로마문화를 흡수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라는 일본 제1의 유리 공예가가 쓴 「로마문화왕국 - 신라(新羅)」(新潮社)]


 

월씨국 = 월지국  (소월지와 대월지)   아유타국이 월씨국

 

     북방민들인 말갈족(맑알족, 말고려족 = 여진족, 만주족)들은 춘추시대 이후 중원계국 강대화에 따라 병합, 분리하다가, 전국(戰國)시대에서 한(漢)나라 때까지 중앙아시아 아무다르야강(江) 유역에서 활약한다.   전국시대 말기에는 서몽골로부터 간쑤[甘肅] 서부, 황허강[黃河] 상류, 동(東)투르키스탄, 중가리아, 서(西)투르키스탄의 일부에까지 미치는 대세력으로 하서회랑까지 점령하며 월지국을 세운다.   월지국이 곧 월씨국이다.   말갈족은 후에 이름이 여진족으로 만주족으로 바뀌며 금나라와 청나라(후금)을 세운 민족이다.

 

    우리 민족을 크게 분류하면 퉁구스족에 속합니다.   여기에는 동부시베리아거주 몽고족,  여진족(만주족),  부여족(예맥족)이 있다.   다시 세분하면 동부시베리아 에벤키족등은 북퉁구스족, 만주족과 부여(예맥)족은 남퉁구스족에 속합니다...   우리민족은 남퉁구스족중 (예맥)퉁구스족입니다.

 

    (예맥)퉁구스족부여, 동부여, 북부여, 두막루, 고구려(졸본부여), 백제(남부여), 북옥저, 남옥저, 동예, 예맥계말갈족(속말말갈,백산말갈,백돌말갈)이 여기에 속합니다.    (만주)퉁구스족 보통 만주족으로 불리는데, 요나라 금나라 때는 여진족(흑수말갈족이 중심)으로 불렀습니다..... 여기에는 숙신족, 읍루족, 물길족 그리고 말갈7부중 숙신계말갈족(흑수말갈, 안차골말갈, 호실말갈, 불열말갈)이 여기에 속합니다.

    한나라 세력 확장기간에 서쪽으로 이주해온 월씨족이 아프가니스탄지방의 원주민과 연합하여 대월씨(BC4세기~AD1세기)를 형성하였을 때 그곳에 있던 스키타이인들도 그 치하로 통합된다. 

    발해와 고구려를 함께 연구한 한규철 경성대 교수(국내 제1호 발해학 박사)는 피지배계층 대다수가 말갈인이었다며 발해를 우리 역사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발해와 고구려의 풍습이 같았다"는 한마디로 단호하게 부정했다.

    "고구려가 없어진 지 30년 만에 건국된 나라의 피지배계층이 어떻게 갑자기 말갈인으로 바뀔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 한 교수는 "'말갈'이라는 이름은 자칭이 아닌 타칭이며, 고구려 변두리에 살던 사람을 이르던 말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말갈은 고구려에서 수도였던 평양성 사람을 국인(國人)으로 불렀던 것에 대칭해 고구려 변방주민을 부르던 비칭”이라며 발해를 고구려 유민이 세운 국가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말갈이라는 호칭이 중국사서에 6세기 무렵 갑자기 등장하는 데다 그 영역이 숙신(쥬신)과 읍루(압로)의 거주지였던 쑹화(松花) 강 중하류를 넘어 만주 전역과 한반도 북부로 확대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쥬신, 숙신, 읍루, 압로, 동호는 언어나 문자 상의 차이에 의한 고조선의 칭호들이며 흉노, 선비, 거란, 만주, 예맥은 한족들이 한자의 표기상 기법으로 후에 천비하게 여기도록 붙여논 동이족의 칭호들이다.

 

 

    기원전 177년 흉노의 묵특선우에게 공격을 받고, 월지는 감숙에서 쫓겨나 서쪽(일리-이식쿨유역)으로 이동한다.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무다르야강 북안에 중심을 두고 그 남쪽의 대하(大夏 : 드하라의 음역으로, 아프가니스탄의 北半 드하레스탄을 가리키며, 당시 그리스인 식민왕국 박트리아의 중심지)를 지배하였다.   그것은 한(漢)나라가 대월지(大月氏) 와 더불어 흉노를 협격(挾擊)하고자 하여 장건(張騫)을 파견한(BC 139) 직후의 일이었다.   대월지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대하 지방의 통치에 힘써 파미르·힌두쿠시의 남북에 토착제후(土着諸侯)인 다섯의 흡후(翕侯)를 두고 다스리게 하였다.   거절한 이유는 대월지와 흉노는 고조선의 같은 후예이나 한족들의 나라인 한(漢)나라는 고조선의 환웅시대 때 반역, 배신하고 떨어져 나가 고조선의 후예들과 적대시하는 자들이었기 때문.

 

    AD 1세기경 다섯 흡후의 하나인 귀상흡후(貴霜翕侯)가 대두하고, 이어서 대월지에 대신하였다(쿠샨왕조).   또한 황허강 상류 유역에는 대월지의 잔존세력이 남아 있어서 소월지(小月氏)라고 하였다.

 

[고조선의 후손으로 본 월지국]

 

(태백일사환국본기)

구다국은 옛날에는 독로(瀆盧國)이라 칭했고 북개마대령(北蓋馬大嶺=인산산맥?)의 서쪽에 있는 나라다.   월지국(月漬國)은 그 북쪽 500 리에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韓)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마한(馬韓),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한(弁韓)인데, 진한을 옛 진국(辰國)이라 하고, 진왕(辰王)이 월지국을 통치하였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월지국은 진주(辰主)의 치소(治所) 라 했다.   곧 월지국은 진국의 도읍지 라는 것이다.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

월지국이 고대의 우리나라 고조선 을 밝히고 있다.

{국어대사전}

월지국목지국(目支國)이라 하고 목지국은 옛 진국의 한 부족국가라 하였다.

옛 진국이란 고조선을 지칭한다.

{불교사전}

"월지(月支)는 월씨(月氏)라고도 하며, 서역에 있던 큰 왕국"

월지국(月支國)을 서역에 있던 대월씨(大月氏)에 결부시키고 있다.

대동방씨족원류사

1. BC230년경 秦나라가 6을 정벌통합할 때, 韓나라 또한 멸절되었다.

이에 여러 나라[6]의 부호들을 秦나라의 수도 함양에 옮겨 살게 하였는데 ... 이러한 때에 산동, 장안 등지에서 좋은 물건들을 가지고 서쪽(서역)으로 대상의 길을 다니면서 서쪽 지방에도 안주하면서 한 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2. 서역 그 곳에 대월 , 안식, 사라 라는 지명도 생겨나기도 했다.

한단고기

bc195~ [74기준] 제가의 무리는 상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일컬어 중마한이라 한다.


    일반적인 개념으로 기준시기(bc195)의 번조선(기자조선)은 연나라세력과 대립하며 요녕지방에 위치한다.   번조선의 상장군 탁은 요녕지방에서 하서회랑에 위치한 월지로 이동한다.(bc195)   그리고는 월지와 함께 쿠샨왕조까지 이어지게 된다.   약간의 시대차이가 있기는 하나 대동방씨족원류사에서 멸절한 韓의 부호들이 이동하는 곳도 함양(장안)이며, 장사를 통하여 서역으로 진출하여 대월과 안식, 사라를 세운다는 것은 일치하는 내용이다.

    東夷 朝鮮人들이 너무도 영리하고 용맹스럽고 지혜가 있어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별명처럼 불려진 것이 신독(身毒) 또는 천독(天毒)이다.   그리고 후일 천축(天竺)으로 불려져 중천축 · 북천축 · 서천축 · 남천축 · 동천축으로 불리게 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광동성(廣東省) 지방의 천축산(天竺山)에서 유래되어 청해성(靑海省)이 있는 곳으로 갔다는 기록도 보이나, 본래 天毒·身毒은 곤륜산을 배경삼아 천산산맥 등지와 타림 분지 등 여러 곳에서 수렵을 했던 용맹스러운 묘족(苗族)의 후예였다.   묘족이란 치우천황 시대의 백성의 칭호이다. 

 

    전한(前漢 B.C.206∼AD.8년) 때는 연독(捐毒國)이나 신독(身毒國)으로 불리었고, 후한(後漢 A.D.25∼220년) 때 와서 천축국(天竺國)으로 불렸음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다.  

 

    한(漢)나라 때는 또한 연독(捐毒國) 이 있었는데, 장안(長安)으로부터 9,800리에 있다.   장안(長安)에서 9,800리라고 한다면 신강성(新疆省) 남부에 있는 지금의 화전(和田)인 옛 이전원(伊甸園) 일대를 말한다.   도호부가 있는 곳으로부터는 2,800리 떨어진 곳이다.   남쪽으로는 총령( 嶺)인 곤륜산맥과 서로 연결되어 있고, 북쪽으로는 오손(烏孫)과 접하고 있다.   오손(烏孫)은 신강성(新疆省) 천산(天山)과 알타이 산록 일대에 있었다.   연독 사람들의 의복은 오손 사람들과 비슷했으며, 물과 풀을 따라 이동했다.   옛날의 색종(塞種)이다.  

 

안사고(顔師古)의 말에 의하면 연독(捐毒)은 즉 신독(身毒)이며, 신독(身毒)은 천축(天竺)이라 했다.   색종(塞種)은 즉 석종(釋種)을 말한다.   말하자면 깨달은 사람들의 가문, 석씨(釋氏) 가문의 혈족이라는 말이다.    석가모니는 여기서 말하는 석씨이다.    석씨가문이 곧 사카족이다.

 

일본을 통일한 '야마토 조정[大和朝廷]'도 일본의 야마토 지역으로 이주한 고조선계 아리아 인들이 세운 나라

 

 기   타

    요나라(거란족)의 전통강역은...선비족(수나라-당나라)의 전통강역과 대체적으로 일치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현 만주에서...황하 이북 + 내몽골 + 외몽골 + 알타이산맥까지... 동남쪽 중원 동부해안 동이지역까지...경우에 따란 한반도까지... 이게 전통적인 선비족들의 주요 강역였으며... 그 위세를 떨칠 땐...이르티쉬 북서쪽의 흉로족들...시베리아의 말갈족(여진족)들도 모두 복속시켰을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朝鮮)이란 국명은...월지의 선 배달국 이란 뜻일까 합니다.    선비족이란 선배족이란 뜻과 같고 선배족이란 선배달국 사람들을 칭한다.

요(료,례)나라몽골리아(몽고례) 같은 뜻의 칭호이다.

요나라몽골이란 국명이냐
요()= 요원하다...멀다..아스라히 가물거린다...의 뜻이 있습니다.
몽()= 이하 동문입니다...요(遼)자와 똑같은 글입니다.

요나라용의 나라란 뜻이며...멀다,요원하다 가물가물하다...등의 뜻도 있다.

    요나라는...중원남부 상당부분까지 다 휩쓴 세계의 황제국이었다....멀다...가물가물하다는 국명이 어울리지 않는다.    즉, 요(遼)는...중원남부(漢族들)가 자의적으로 북방 천자국(고조선)을 낮추어 부른 중원 남부 기준의 국명일 뿐이란 반증.   뜻 만 같은게 아닌...음도 같은 음입니다.   중국의 당요(요임금)의 요나라는 황제국 요나라가 아닌 다른 요나라이든가 이름만 훔쳐다 사용한 요나라인듯 하다.   일본이란 국호도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사용한 우리나라의 이름 중의 하나였는데, 백제가 멸망하자 왜놈들이 자기네 국호로 사용하였다 한다.

멀~~~~요...먼~~~~몽...
우리 순수국어로...~"이 요(遙)와 몽(蒙)의 공통 음입니다.
그리고 보면 주몽(朱蒙)은...두몬(두만=투멘=돌궐의 왕)이자...서요의 임금이란 뜻입니다.

참고로...동남아와 중국인 한국인들만 빼곤...ㅇ"발음은...ㄴ"과 구별이 절대 안됩니다.
몽골족들 자신은...몽골을...몬골..먼걸..의 중간발음으로 합니다.
그걸 우린 "몽"으로 듣는 겁니다...정식국명은...몽골리아(몽고례=蒙高麗=蒙古遼)입니다.

몽골인들은....자신들의 원 조상이...훈루"라고 합니다.
네..흉로족을 말합니다...때론 브리야트라고도 합니다...네...부여족을 이릅니다.
그들은 최고의 영웅을..'바타르라고 합니다...네.  배달"을 의미합니다...배달의 어원은 밝은 달...태양이며...영웅인 겁니다. 

(예,요)는...(韓,桓)"이전의 태양명칭 이다가...환국 지배 후... (바다,강)으로 격하된 명칭일까 합니다.
그래도 그 음가는 높아서...구비치는 강줄기는 닮은 룡(龍)"을 의미하는 국명입니다.
역대 북방족들의 각 수도에 룡(龍)자가 붙는 걸 봐도 상식입니다.

룡의 "ㅇ"받침은...우리의 "사람(人)"...ㄴ" 양키들의 ing"로 봐야 합니다.
몽골인들은 료(룡)을 "로"라 발음합니다.

훈루라 함은...환국 룡이라 뜻...
아무 르"라 함은...알튼 로 = 금룡(黃金龍)이고...무 로 = 먹룡(墨龍)란 말입니다...황금인지 먹금(墨金=무쇠)인 진 지들 맘입니다.

고려의 "도...양이들의 ~랜드"도...~리아"도...거란의 란(련)"도...려진의 "여(려)"...모두 다 하나입니다.
고려"는 검푸른 하늘&룡이란 말도 됩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몽골족들이...이 고구려와 요나라의 전통 장자족들이라 뵈진 않습니다.
이들은 ...원 몽골 & 청 붕괴 후 카자흐에서...시베리아에서 러시아에에 밀려 내려 온....말갈족들이 상당수 혼혈된 민족.

    물론, 말갈(여진)말고려...몬고려란 뜻이나...이 북방민들은...몽골의 북서 & 북동 시베리아지방 부족들이라 봄이 좋을듯 합니다.    먼 - 몬 = 몽..도...원래의 뜻은... 석가모니(사카족)머니(문=달=)에 있다 보며...성자...쇠(鐵)을 의미한다 봅니다.    북방민들인 말갈족들은 춘추시대 이후 중원계국강대화에 따라 병합, 분리하다가, 전국(戰國)시대에서 한(漢)나라 때까지 중앙아시아 아무다르야강(江) 유역에서 활약한다.   전국시대 말기에는 서몽골로부터 간쑤[甘肅] 서부, 황허강[黃河] 상류, 동(東)투르키스탄, 중가리아, 서(西)투르키스탄의 일부에까지 미치는 대세력으로 하서회랑까지 점령하며 월지국을 세운다.

    원 선비족인 료(堯,遼)족들의 장자족들은...현 만주에 있던 청구국과 서북쪽여진(료딘)의 혼혈인 청나라족들이며...   청조선(天朝鮮=淸)이... 양놈들과 왜놈덜에게 산산이 무너진 후...현 조선족 자치주와 한반도로 이주한 조선족들이 그 직계손일까 합니다.   특히, 현 조선족 자치구와 북한 사람들이지여...

남한여...?
    물론, 우리도 같은 선비조선계 같으나...일제치하 전후에 중원 남부에서 들어온 일본에 굴복한 대한제국(양자강&청도 일대) 망명인들...   즉 중조(차이나)족들이 서울, 경기에 많이 섞인...왜놈들도 꾀나 섞인... 선비족들 입장에선...불량 선비혈통일까 합니다.

 

    백두민족이란 백두산이 우리민족의 발원지 즉, 영산으로써 고구려말로는 높구려 즉, 백두산이므로(구려란 : ~을 존중하는 의미를 할때 붙이는 원래 우리말로써 높을고高 자는 있는데 구려란 중국말은 없으므로 중국인들은 대충 만든바, 글귀구句자, 마을 려麗를 써서 고高씨의 마을이다 라는 뜻의 고구려高句麗라 씀.)  요즘은 고씨가 원래 중국 고씨가 원조라고 조작하며 고구려는 중국변방국이라고 잘도 꾸며대는데, 우리 후손대에가서는 금金씨도 원래 중국 금씨였다고 조작하며 우겨댈것이니, 한국사람들은 지금의 단군신화처럼 속지 말아야 함.)    고구려란 백두산민족이란 존중하는 의미의 존중, 높임말인데, 오늘날  "구리다(나쁜냄새난다 "에이 구려~ " )식의 나쁜 의미의 단어로 방구냄새나 똥 냄새를 표현하고있고,  또는 "싸구려(저질품)~ 을 표현 할 때 쓰는 단어로 전락되었슴은, 언어를 통해서도 구려의 역사를 완전히 말살시 키려는 오래전부터의 치밀한 동북공정의 공작의 일환임을 알아야 합니다.

(한민족 말살 공작)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왜곡, 조작, 축소된 고구려)는 본래의 고구려가 아니다.   고구려高句麗의 려麗는 "나라이름 리(麗)" 자이다.   그러므로 고구리가 맞다.   고구려는 각기 한자로 高離, 離, 高麗, 高句麗, 高丘麗 그리고 연관된 九夷, 九麗, 高黎 등의 표현이 있다.   고구리, 또는 고리의 리麗는 리離와 의미가 통한다.   리麗는 "크게 빛난다.   찬란하게 빛나다.   환하게 빛나다."의 뜻이다.    그리고 리離는 주역 팔괘 "건곤감리손이곤태"의 리離괘로 태양太陽을 상징한다.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는 고구리 주몽성조께서 고구리를 건국하신 이래 고구리 후기에 이르러 고리로 불렸으며, 왕건태조가 고구리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고리로 국명을 정하였으므로 주몽성조의 고구리왕건태조의 고리를 구분하여 부른다는 정도이다.   그런데 주몽성조 이전에 고구리가 있었고 또한 고리가 있었다.    아래 환단고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리와 고리의 의미는 같으며 같은 뜻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환단고기 북부여기 상편>
    고신을 뽑아서 서압록을 지키게 했는데 그가 병력을 증강하고 성책을 많이 설치해서 우거를 막아 공을 세우니 승격시켜서 고구리후(高句麗侯)로 삼았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57년 임술 4월 8일에 해모수가 웅심산으로 내려와 군사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離國 사람이었다.
대체로 북부여가 일어남은 이에서 비롯하고 고구려는 곧 해모수가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또한 고구리高句麗라 일컬었다.
각설하고 환단고기 삼신오제본기에 의하면 고高는 신神이며 두頭의 뜻이다.

환단고기 삼신오제본기>
    삼신(三神)이란 어떤 설에서 삼(三)은 신(新)이 되고 신(新)은 백(白)이 되며, 신(神)이 고(高)가 되고 고(高)는 두(頭)가 되기 때문에 또한 백두산(白頭山)이라 일컫는다고 한다.   또 이르되 개마라고도 하는데 개마(蓋馬)는 해마리(奚摩離)의 전음이며 고어에 백(白)을 일러 ‘계(奚)’라 하고 두(頭:머리)를 일러 ‘마리(摩離)’라 한다.

    그렇다면 고리高麗의 뜻은 "고리高麗 - 높게 빛난다.   신리神麗 - 신의 광명이 빛난다.   두려頭麗 - 머리가 빛난다"가 된다.   리麗는 "태양이 빛난다"는 뜻이고 이離는 "태양"이란 의미로 쓰인다.   리麗를 리離를 바꾸면 고리高離는 "고리高離 - 높은 태양, 신리神離 - 태양의 신, 신성한 태양, 두리頭離 - 우두머리 태양, 해머리 " 의 뜻이 된다.

    이 두가지 고리高麗와 고리高離의 뜻은 아래의 환단고기 환국본기와 그 뜻이 상통한다.

환단고기 환국본기>
    옛풍속이 광명을 숭상하여 해를 신으로 삼고 하늘을 조상으로 삼았다.   태양은 광명이 모이는 곳이요, 삼신이 머무는 곳이니, 사람들이 광명을 얻어 업을 지으며 억지로 함이 없어도 이루고, 아침에는 동산에 올라 경배를 하고 저녁에는 서천에 나아가 뜨는 달에 절한 것이다.

    태양은 삼신이 머무는 곳이므로 신성한 태양이며, 가장 높은 태양이며, 우두머리 태양인 것이다.   아울러 이 태양은 밝게 빛나며, 고귀한 빛을 던지고, 삼신의 덕과 지혜와 기운을 던져준다.

    그런데 이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동방의 땅이다.   그래서 아래의 고리국高離國을 다른 말로 고리국;離國으로 썼다.   고리국과 고리국이 서로 통하는 말이지만은 환단고기에는 고리국;離國이 네 번 나오며 고리국高離國이 한 번 나온다.

    그러므로 정황을 살펴보면 고대에는 고리국;離國의 의미가 고리국高離國 보다 강하였다가 후대에 고리국이 더 많이 쓰여 졌다고 볼 수 있겠다.

환단고기 신시본기>
    비로소 나라를 일컬어 조선 삼한이라 했는데 고리高離,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夫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조선의 관경이었다.

    아무튼지 간에 고高는 고; 와 통하는데, 여기서 의미를 둘만한 것은 고의 방향성에 대한 것이다.   고;는 고高 + 목木이다.    그러므로 고리국이란 높은 태양이 동방의 땅, 아침의 나라에서 솟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태양이야말로 진정으로 높다는 것이다.

    이것은 솟대의 풍습에서 살필 수 있다.    솟대는 나무 위에 새의 형상을 만들어 놓는 풍습인데 보통 나무 하나에 세가 세 마리거나 세 개의 나무에 새를 세 마리, 또는 나무 하나 가지가 세 개인 나무에 각 가지에 세를 한 마리 씩 매달아 놓는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고구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고구리의 구는 句이다.   구는 문을, 문은 글이란 뜻이므로 문을 상징한다 말할 수 있으며, 아울러 구는 활시위를 잡아당긴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큰 활을 잘 쏘는 무의 나라를 말한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무의 나라를 말한다 할 것이다.

 

    어떤 기록에는 구句 대신 구丘를 쓴다.   그렇게 되면 고구려의 뜻은 동방의 태양이 동쪽 언덕에서 떠오르는 모습을 담아낸 말이 된다.   확장하여 고구리의 구九가 구려九麗, 구려하九麗河의 구九와 같은 경우의 뜻을 생각해 볼 때는, 구는 가장 높은 수이므로 가장 높은 나라, 종주국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9는 구궁팔풍의 9와도 같으며 지상의 팔방민족을 다스리는 중심 민족을 상징한다 할 것이다.

 

코 리 안      쥬신 - 숙신 - 고구리 - 한국

[한국의 국호와 역사무대]

    우리 국호는 대한민국이다.   줄여서 한국이다.   또는 코리아(골이아)(바이칼 호수지역에 거주한 부리야트 = 부여족의 일부였던 코리 = 고리 = 고구려 = 고려.   유럽의 불가리아(붉알이아) = 부여족의 일족이 이동하여 건국한 국가)다.   한국은 [한단고기]에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이름으로 유라시아 전역으로 문명으로는 아메리카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문명를 자랑하는 12연방국가로 환인이 천제로 통치했던 나라를 의미한다.   '한''환'은 동일한 의미로 "환하다.  하나다"의 의미로 환한 빛으로 만물을 하나로 비추는 태양에 비유된다 하겠다.

 

    따라서 '한(환)인'은 태양처럼 만인에게 덕과 자비로 통치하는 '환한 사람'을 의미하는 존재로 종교사상으로 표현하면 성인의 모델이며, 마음이 맑고 밝고 환한 존재라 하겠다.   또한 '한(환)국'이라고 했을 때는 한인들이 사는 나라로 '하느님.  하나님 나라'라는 의미라 하겠다.   또한, 크다. 중심. 하나. 왕 등 20여가지를 의미하는 (한국)은 (중국) = (몽골) = (슈메르)과 동일한 의미다.



 

     즉, '한(환국)'이란  "마음이 맑고 밝고 환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고로 우리 민족은 이 '한국'이라는 국호를 오늘날까지 간직하며 끈질기게 살아 왔으며, '한국'이란 단순히 한반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즉 온누리를 의미하는 개념이라 하겠다.   그리고, 다시 그 찬란했던 고대의 환국시대를 부활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한반도 사람들의 마음부터 태양처럼 맑고 밝고 환한 존재들이 되야 한다.   내부적으로 사대매국주의를 청산하고 청정한 민족정기가 충만한 나라가 되야 하는 것이다.   남북이 통일되고 남북철로를 따라 유라시아와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으로 뻗어 나가 흩어져 사는 우리 한민족을 만나고 그들의 피속에 잠재된 환인을 깨우고 환국을 깨워야 한다.   교류해야 하고 협력해야 하는 이유다.   민족사를 유라시아 무대로 광범위하게 설정하고 바로 세워야 한다.

     12한국을 조선(쥬신 = 숙신)이라고 했다.   그리고, 12환국이후 분열된 광활한 쥬신의 땅을 다시 회복한 인물이 고구려의 후예인 몽고리의 징기즈칸이다.   [한단고기]에 들어 있는 안함로(安含老)의 삼성기전(三聖記全)을 보면 한국을 설명하면서  "우리 [桓]의 건국은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인데 시베리아(斯白力)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하여 신이 되신(獨化之神) 한님이 계시어 그분의 밝은 빛이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로 만물을 낳았다.   오랫동안 지극히 오묘한 기(氣)를 타고 노닐면서 쾌락하게 살았다...  파나류산(波奈留山) 밑에 한님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天海)의 동쪽 땅이다.   이 나라는 모두 아홉 족속[九桓], 12개의 나라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땅의 넓이는 남북이 5만리요 동서가 2만리가 된다.   국의 9족은 황이(黃夷), 백이(白夷), 현이(玄夷), 적이(赤夷), 풍이(風夷, 藍夷), 양이(陽夷), 우이(于夷, 툉夷), 방이(方夷), 견이(쩼夷) 등이고, 12개국을 살펴보면 ①비리국(卑離國-비류국), ②양운국(養雲國), ③구막한국(寇莫汗國), ④구다천국(句茶川國-캄차카), ⑤일군국(一群國), ⑥우루국(虞婁國-Ur/필나국/Pella), ⑦객현한국(客賢汗國), ⑧구모액국(句牟額國), ⑨매구여국(賣句餘國), ⑩사납아국(斯納阿國), ⑪선비국(鮮裨國-通古斯/TUNGUS), ⑫수밀이국(須密爾國-슈메르/SUMER) 다."라고 했다.

 

 

     또한, 중국의 유명한 이십오사 중의 하나인 진서(晋書)는  "숙신(肅愼)씨의 나라가 바로 파나류국 즉 한국[桓國]을 가리키는 것이고, 숙신의 원음은 쥬신(조선-朝鮮)"임을 증언하고 있다.   과연 옛 역사서들에는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던 영역들을 쥬신(조선)이라 표기하고 있으니, 예를 들어보면 태고의 역사를 열자마자 대뜸 朝鮮[쥬신]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옛 쥬신[古朝鮮]보다 훨씬 먼저 그 땅에 존재했던 肅愼[숙신-쥬신]이 바로 그것이다.   계속하여 이들 노대국들의 뒤를 이어 같은 민족으로 같은 땅에서 흥기한 여진족도 자신들을 쥬신의 방언쯤으로 보이는 朱里眞[주-ㄹ진]으로 불렀으며, 불과 20세기 초반까지도 중국대륙을 호령했던 만주족도 자신들을 스스로 珠申(주신)족이라고 청태조실록(淸太祖實錄)에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쥬신[朝鮮]이라는 나라이름은 한문자가 생기기 훨씬전인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서(晋書)의 숙신열전[쥬신열전-肅愼列傳]에는 한국12연방을 숙신(肅愼)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는 소리 말을 뜻글인 한자로 쓰는 과정에서 쥬신이라는 소리를 나타낼 수 있는 수단으로 쥬신[朝鮮]과 숙신(肅愼)을 선택하여 쓰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슈메르인들의 일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내세우는 [선민]이라는 의미자체가 벌써 [the chosen people]이니 쥬신 사람들이 그 주인공들이며, 당시 쥬신의 광역이 슈메르를 중심으로 중동지역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으며, 성서와 기독교 사상를 포함하여 불교. 유교. 도교. 이슬람교의 뿌리자체도 모두 12환국연방 쥬신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우리 한국민족을 옛부터 백의민족이라고 하는데, 몽골도 흰옷을 중시하고 아라비아인들도 흰옷을 중시하고, 세례요한의 공동체도 흰옷을 중시했는데, 이것은 모두 쥬신문화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수메르의 제1왕조(BC.2,600년경)를 건설한 엔릴 영웅이 소호국(少昊國) 사람이다. (문정창)

     수메르족은 BC.5,000∼4,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에 나타나서 BC.3,000년경부터 고도문명을 전하고 BC.2,000년경에 아모리인에 멸망하여 사라졌는데 태양숭배, 삼신숭배(하느님), 간장점, 상투, 평좌법, 씨름 등이 우리와 같다.


     유라시아 전역의 쥬신(12한국연방)을 복원한 고구려의 후예 징기즈칸의 몽고리(몽골)   징기스칸의 성씨는 金씨이며, 고조선의 후예들이 거주하는 만주에서 중원을 지나 터키까지 정복하고 정복한 전역을 통치하려고 자금성을 지었다고 한다.   그 때 몽고인들은 징기스칸이 정복한 땅을 지배하려고 계속 따라 나섰으며 너무나 넓은 지역을 정복하는 바람에 우둔한 사람들 빼고는 다 나가다시피 하여 결국 징기스칸의 정권이 성립되기 전에 죽는 바람에 몽고를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주저 앉는 바람에 몽고에는 국가발전을 이끌 주역이 없어 지금까지도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민족과 몽고족

 

     [한단고기]기록에 따르면,  "4대 오사구 단군은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의 칸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몽골은 8세기 무렵 북만주 흑룡강 상류인 에르군네(Ergüne) 강[河] 유역에서 몽올실위(蒙兀室韋)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여 당나라 · 위구르 · 토번 등이 붕괴, 또는 와해되는 틈을 타서 지속적으로 서쪽으로 진출하여 11~12세기 무렵에는 오난(Onan) 강[河] 일대까지 진출한다.   오난강으로 진출한 몽골은 게레이드(Kereyid)· 메르키드(Merekid)· 타타르(Tartar)· 나이만(Naiman) 등의 부족들과 서로 다투면서 성장하다가 1206년 칭기즈칸을 중심으로 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제국을 건설하게 된다[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역사와 민속』(민속원 : 2001) 205쪽].

 

 

     몽골의 기원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몽골은 동호(東胡)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다.    즉 몽골은 한나라 초기 흉노가 동호를 제압하자 살아남은 부족들이 동쪽으로 와서 그 가운데 어떤 무리는 선비가 되고 어떤 무리는 오환(烏桓)이 되고, 후에 이들은 다시 실위(室韋 : 몽골거란(契丹)이 되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남쪽에 있는 동호는 거란이 되었고 북쪽에 있는 동호는 몽골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당나라 때에 이르러 현재의 흑룡강 부근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몽골 또는 모골 또는 머골(蒙兀)이라는 이름이 이 때 나타났다는 것[屠寄,『蒙兀兒史記』1 世紀].몽골의 원류인 동호계는 주로 해(奚 : 현재의 내몽골 지역), 습(飁) 실위(室韋 : 현재의 몽골 지역) 등 이다(『新五代史』74 契丹 ; 『北史』94 奚).


     1990년 대만에 거주하는 세계적인 몽골인 학자 한촐라 교수는 한국에 도착하자 "어머니의 나라에 왔습니다."라고 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한촐라 교수의 고향은 동명성왕(한나라 침략을 공격하여 물리치고 해부루 단군을 몰아낸 북부여 5대 단군 고두막,  해모수와 친척인 고두막은 단군조선 47대 고열가 단군의 후손으로 소서노의 할아버지)의 원주지로 추정되는 홀룬보이르 초원(대싱안링 북동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촐라 교수의 말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한국이 몽골의 '어머니의 나라',  이 말은 아마도 몽골의 시조신인 알랑고아의 아버지가 고주몽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찍 과부가 된 알랑고아의 삶은 참으로 고달팠다.    특히 유목생활에서 남편이 없이 살아갈 때의 그 처절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즉, 몽골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몽골비사』에 전해지는 성녀이자, 우리민족의 할머니가 마고가 추앙받듯이, 몽골의 시조로 추앙받는 알랑 고아의 이야기는 이렇다.    알랑 고아의 아버지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은 사냥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 바르고진을 아리크 오손(Arig Usun:청결한 강이라는 뜻)에서 만나 알랑 고아를 낳는다.    그런데 코릴라르타이-메르겐에게는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코리족(Kohri)을 떠날 결심을 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모아 코릴라르(Khorilar)라는 씨족을 만들어 성스러운 산 보르칸으로 이동한다.    성스러운 보르칸산은 땅이 좋고 사냥감이 풍부한 곳이다.   알랑 고아는 이후 새로운 땅 보르칸에서 알랑 고아는 결혼을 하고, 다섯 아들을 낳는다.    그중 세 아들은 남편이 없을 때, 몽골 설화에 의하면 ‘빛의 정령을 받아’ 낳게 된다.    그의 다섯 아들이 각각 몽골의 씨족을 이루면서 알랑 고아는 몽골인의 어머니가 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몽골의 신화가 우리 민족의 신화와 너무 많이 닮아있다는 점이다.    코릴라르타이 메르겐이 떠나온 코리족(Kohri)은 주몽(朱蒙)이 코리(고리) 부족에서 일단의 지지 세력을 이끌고 남으로 이동하여 나라를 세운 뒤 국명을 코리의 한 나라임을 나타내기 위해 고(高:으뜸) 구려(Kohri)라고 부른 것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다.    또한 코릴라르타이 메르겐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로, 한역하면 고주몽(高朱蒙)과 같은 이름이다.    몽골의 시조 '알랑고아'는  '아리랑 고아'라고 할 수 있으며, 풀이하면 "하느님이 함께하는 떠돌이"정도로 유목민의 삶이 내재 된 이름이라 할 수 있고, '보르칸산'은 '밝한 산'으로 유목생활을 하며 떠돌아 다니는 몽골인들의 마음의 성지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성지, 몽골인들이 보르칸산이라 부르는 지역은 헨티아이막 북부에 있다.     알랑 고아가 터를 잡은 곳칭기스칸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 그리고 그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몽골 학자들은 성지의 의미를 훌륭한 조상들의 쉼터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금의 보르칸산은 칭기스칸 가문의 조상신이 머무는 곳이란 해설도 그렇게 붙여진 것이다.    이 보르칸산에서 전체 부족 회의로써 유럽 정벌이나 금나라 정벌 등 부족의 운명과 관련한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코릴타(Khurilta)를 열었고,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천의식을 치렀다.

 

     칭기즈칸의 어머니도 알랑고아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처절한 가난과 절망 속에서 자식을 키웠고 그 아들은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칭기즈칸을 정신적 지주로 삼는 몽골에게는 칭기즈칸의 어머니가 바로 알랑고아이며 민족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그 어머니의 나라가 한국일 수밖 없다.    한국은 바로 고주몽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알랑고아의 아버지가 고추모이던 아니던 중요한 건 몽골의 조상을 <소롱고 = 무지개의 나라 = 한반도>로 표현되는 한국인들로 인식하고 한국을 귀하게 생각하였고,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할 때도 고려만은 독립국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조상들이 몽골인에 해당하는 터키인들도, 칭기즈칸의 후예들이라고 자처하여 인도에 무굴제국을 세운 몽골인들도 자신들의 뿌리를 한국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인도시성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 코리아'라는 시어는 이러한 역사인식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시인 것이다.

 

     몽골에서는 한반도를 '솔롱고스', 즉 '무지개의 나라'라고 부른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즐겨 입는 무지개의 일곱 색깔 그 색동옷의 고향이 바로 몽골이다.    솔롱고스, 한마디로 '꿈의 나라'다.    모질게 춥고 힘든 유목생활에서 끝없이 남으로 내려오고 싶은 몽골의 소망의 표현이 바로 '솔롱고스'가 아닐까?   '몽골은 또 다른 한국'이고, '한국은 또 다른 몽골'이다.   한국에서는 복숭아나무를 귀신을 쫓는 나무라고 하여 불에 태우지 않는다.    몽골은 불(부여 = 브리야트 = 불가리아)로써 모든 부정을 없애는데 복숭아나무를 절대로 불에 넣어 태우지 못하게 한다.    몽골에 있어서도 복숭아나무는 바로 귀신을 쫓는 나무다.   터키 말이나 몽골어· 한국어· 일본어가 유사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가령 검다(black)라는 말에 대해서 이들 언어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터키어 ――――― 몽골어 ――――― 한국어 ――――― 일본어
                         카라(kara)      카르(kar)             검다             구로(くろ)

 

 

     그리고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Kharakorum)의 경우 중국의 문헌에는 각라화림(喀喇和林), 또는 생략하여 화림(和林) ·화령(和寧) 등으로 쓰인다.    유목민들이 가진 천손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인 태양(太陽, 日)을 보면 몽골어에서는 '나ㄹ'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말[날]과 완전히 같다.    유목민들이 동쪽을 향해 예를 올리는 것은 흉노· 돌궐· 거란 이래의 전통이다.

 

     몽골은 전통적으로 태음력으로 1월1일을 차강사르(흰색의 달)라고 하여 최고의 명절로 친다.    설날을 차강사르라고 부르는 것은 백색이 길상· 풍부· 순결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빔을 입고 밖으로 나가 동이 트기를 기다리고 동이 트면 먼저 해가 뜨는 방향으로 오른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린다.    하늘에 예를 올릴 때 마유주나 우유 등을 하늘로 뿌리는데 이것을 차찰[배천(拜天 : 하늘에 절함)]이라고 한다.    이 같은 의식은 고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샤만 신앙의 유풍이다.    우리가 하는 해맞이 풍습과 다를 바 없다.   몽골은 우리와 같이 백색 숭배의 풍습이 강하다(몽골이 훨씬 더 심하다).

 

     몽골인은 종종 겔의 입구에 천마(天馬)를 그린 깃발을 내걸고 있는데 말은 행운을 상징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애마(愛馬)를 순장하는 풍습이 있다.    이것은 사후 말이 없으면 하늘나라로 갈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몽골인들은 백마(白馬)를 가장 귀한 것으로 생각한다.   동몽골의 다리강가 지방에는 한국의 색동저고리와 같은 전통의상이 내려오고 있다.    이 일대는 고대의 코리(貊)족의 이동과 관계가 있고, 또 그들이 한국을 솔롱고스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성이 깊다.   겨울철에 몽골의 아이들은 비석치기나 '샤가'를 한다.    샤가는 우리의 윷놀이와 같은 놀이.    이러한 풍경은 30~40년 전에 한국의 겨울에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이었다.    물론 윷놀이는 아직도 즐기는 놀이이지만.[윤복현]

 

 

한민족과 아즈텍문명

 

 

     그리고 아스텍을 연구한 미국과 유럽학자들이 ‘콜와’라는 명칭은 원래 ‘고리’라는 말에서 왔으며, ‘고리’는 ‘물건이 둥글게 휘어진 것’을 가리킨다고 밝혔어요.    우리말에서 둥글게 휘어진 물건을 고리라고 하잖아요.    ‘문고리’도 그 한 예죠.   지역적으로 고조선이 요동지역에, 그리고 부여가 두만강 위쪽 우수리강 유역에 퍼져 살았으니 이웃에 살았던 것이 맞죠.    아사달(=아스다) 지역인 요동에서 출발하여 북상하면 제일 먼저 도착하는 곳이 옛 부여인들이 살던 땅이잖아요.


     부여를 건국한 우리 선조들이 ‘고리’라고 불렸다는 것은 중국문헌에도 나옵니다.    아스텍의 모든 기록들이 정확하게 우리 선조들의 역사와 일치하고, 또 ‘아스다’니 ‘고리’니 하는 명칭까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 운영자 주) “고리 = 구리”의 의미로 북두칠성의 자손 즉 천손민족이 이땅에 내려와 최초의 명명된 우리민족의 이름(국명) 이다.

 

멕시코 ‘콜와’족은 누구인가?

     멕시코쪽 기록에 의하면 기원후 49, 50년부터‘콜와’라는 민족이 멕시코에 도착하기 시작하여 670년 경에는 대규모로 이동해 왔다, 이렇게 나와요.   (이 명칭으로 불리는 인디언이 미국, 멕시코, 페루에도 있다).


     ‘콜와’에 관한 기록을 보면, 이들은 멕시코에 도착한 이후 다섯 집단으로 나뉘어 한 집단만 지금의 멕시코시티 지역에 남고, 나머지는 동서남북으로 흩어졌다고 해요.    남쪽으로 향한 집단은 중미 지역을 지나 남미로 내려갔다고 봅니다.    남미 잉카제국의 언어에 다양한 우리말 흔적이 나오는 것이 그 증거죠.    아스텍인들을 맞이한 이들은 바로 멕시코시티에 그냥 남았던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을 이끈 지도자가 ‘케찰코 아들’이라 불리던 무당이었어요.   케찰코 아들은 그림에서 보듯 우리민족의 ‘용’(龍)이에요.   즉 용을 신으로 모시던 무당이 지도자였지요.

 

               → 운영자 주 : 머리모양이 고구려 고분벽화 부인도 머리와 같다.


     멕시코의 기록에 의하면, ‘콜와’의 어원인 ‘고리’라는 말은 ‘둥글게 휘어진 물건’ 이외에 ‘나직하고 봉우리가 둥근 산’과 그리고 ‘할아버지’를 뜻한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도 이런 산을 고리라고 했단 말이에요.    충청도 옥천군에 환산(環山)이 있는데, 그 옛 이름이 고리산이라 합니다.

 

     그러면 이건 아스텍 쪽의 문헌과 일치하죠?    또 고리타분하다, 이런 말 쓰죠? 구세대란 말이죠.    할아버지를 가리킬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우리말의 ‘고리’와 멕시코의 ‘콜와’족을 가리키는 ‘고리’는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부여계열의 우리민족일 가능성이 큰 것이죠.   고리족!

 

 

멕시코’라는 나라 이름은 무슨 뜻?

     오늘날 멕시코Mexico는 ‘맥이가 사는 곳’이란 뜻이에요.    우리민족이 ‘맥이’에요.    우리민족은 예맥족 또는 맥족으로 불리어 왔는데, 5세기경 기록된《후한서》에 보면 우리민족을 ‘맥이’라고 불렀다 합니다(신용하 교수가 밝힘).    동이(東夷)의 이(夷)자까지 붙여서 맥이(貊夷)라고 불렀어요.    발해인들이 820년경에 요동을 출발했으니, 5세기 이후의 명칭인 ‘맥이’를 사용한 것도 역사적 흐름상 맞지요.    아스텍인들은 그들 제국의 수도를 ‘맥이곳’이라 불렀어요.    자신들을 가리키는 ‘맥이족이 사는 곳’이란 뜻이지요.


     스페인 사람들이 와서 그 명칭을 듣고 스페인어로 ‘Mexico’ 라고 기록했어요.   이 단어는 스페인어 발음 원칙으로는 ‘멕시꼬’로 읽어야 하지만, 아스텍인들이 ‘맥이곳’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 명칭에 따라서 ‘멕이고’라고 발음하죠.    오늘날에도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멕시코를 ‘멕이꼬’라 부릅니다.   그러고 보면 멕시코는 맥이족 곧 우리민족이 사는 곳이란 뜻이잖아요.    땅이름 하나만 봐도요(웃음).


우리 문화와 아스텍 문화의 유사성은?

아스텍인의 탄생과 육아, 생활과 놀이 문화 전반 및 장례와 제사 문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와 풍습, 언어가 우리 민족의 것과 너무도 많이 일치합니다.

 기원전 7세기부터 3세기까지 스키타이민족은 흑해초원 북쪽부터 흑해, 돈강(Azov해로 흘러 들어가는 러시아 중부의 강)동쪽 부터 서쪽 다뉴브강까지 차지했다.   스키타이 부족 중 최고의 위치는 지배층에 속하는 부족이며, 다음이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부족, 최하위층이 농경생활을 하는 부족으로 이들은 지배부족과 유목민의 지배를 받았다. 

 

(사진 융성기의 스키타이 영역, 노란색)


     스키타이민족의 융성기는 기원전 4세기~3세기 초에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발전에 최전성기였다.   수많은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인들이 정치 경제 상업의 중심지인 흑해연안 카맨스코 고로다스케 (Kamenskoe Gorodishche) 지역에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인 기원 전 339년 스키타이왕 아테아스(Athesas)는 스키타이 제부족을 통합해서 영토를 확장해 트레시안(Tracian)국경인 다뉴브강까지 진출했다.   아태아스왕은 나이 90에 마케도니아의 필립공(Philip, 그리스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과의 전투에서 전사했으나 스키타이 왕국은 그의 죽음에도 부강한 국가 형태를 유지하다가 기원전 3세기 말 서쪽으로 부터 처들어오는 켈트(Celt)족과  트레시안(Tracian)족, 동쪽에서 처들어오는 사마시안(Samathians)족에게 밀려 스키타이인들은 이들에게 흡수되며 역사의 장에서 사라졌다.   스키타이 민족의 역사는 기원전 7세기 ~기원 후 3세기로서 약 1000년간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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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는 말

 

  유목민들이 생활하는 초원지대는 정착국가와 같이 경계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이들은 단일문화권으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유목민은 말을 타고 달리며 상당히 먼 거리도 빠른 시간에 이동하며 그들의 생업특성에 의하여 부족끼리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제국을 이루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자연히 같은 문화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문화의 원류가 어디인가는 깊이 있게 연구되어져야 합니다.   우리민족은 원래 기마민족으로 일찍이 수준높은 문화를 이루었습니다.   우리 문화가 원류가 되어 세계 각지로 전파된 흔적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는 현재 북방유목민의 문화 또한 바로 우리 문화의 갈래임을 밝혀가야 할 것입니다.    스키타이가 사용한 각궁과 말 위에서 활을 쏘는 모습, 흉노의 기마모습이 고구려 벽화에서 보이는 모습과 거의 일치하는 것, 스키타이의 대표적인 문화인 동물문양의 모티프가 될 수 있는 그림이 알타이지역에서 훨씬 빠른 시기에 이미 등장했으며 사슴을 소재로 한 그림은 부여지역에서도 발견이 되고 있어 과거 우리 문화가 뒤늦게 스키타이나 시베리아 지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야기되는 이론은 이제 지양되어야 합니다.

출처 : 한 국 복 음
글쓴이 : 금빛물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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