眞理와 求道者/Mission & Evangelism

[스크랩] ★1.선교사 이야기-윌리엄캐리[2]

心中火熱頭腦冷精 2013. 10. 12. 23:00
 선교사열전
              구두 수선공이 위대한 꿈의 선교사로
                                   윌리엄 캐리 이야기

                                                                              -선교타임즈

 

 

 

 

 1761년 햇볕이 따사로운 8월의 어느날 영국의 노스햄프턴셔의 작은 마을에서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 1761-1834, 73세)는 태어났습니다.

 캐리는 그 당시 문맹률이 매우 높던 시절, 끈질긴 도전으로 글을 깨우쳤습니다. 더 나아가 외국어인 라틴어와 헬라어도 깨우쳤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후 아버지의 뜻으로 유망직종 중 하나였던 구두수선공이 되었습니다.

 캐리는 1779년 19살 때, 어느 한 기도모임에서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브리서 13장 13절)

 

 라는 이 한 말씀을 통해, 일생을 그리스도께 헌신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이후 그는 다른 어떤 학문보다 성경공부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세계선교에 눈을 뜨게 된 캐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는 말로, 선교에 대한 열정을 나타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지금이 바로 하나님이 나와 당신을 통해 위대한 세계선교의 역사를 이루실 때인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대하고 그것을 시도하라 했습니다. 그의 말에 감동을 받은 목사들은 침례교 선교회를 만들었고, 영국을 세계각지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였습니다.


 

 1793년 캐리가 32세 되던 해, 그는 인도영혼들을 향한 상한 목자의 심정을 안고 인도 선교사로 가고자 결단 했을 때, 그의 길을 가로막는 많은 장애물들이 나타났으나 우여곡절 끝에,  사랑하는 가족과 토마스라는 선교 동역자와 함께 인도땅에 도착하였습니다. 당시 인도의 힌두교 여자들은 사티(Sati)라는 제도에 따라 남편이 죽으면 함께 불에 타야했고, 갠지스 강가에선 '갠지스강의 여신이여 영광을 받으소서' 라고 외치며 어린아이들을 악어가 득실한 강에 던지는, 그런 미신이 가득한 나라였습니다. 또한, 동인도 회사의 지배 아래 선교를 절대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캐리는 추방을 면하기위해 내륙으로 이동하여 벵갈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말라리아가 창궐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한 아들을 잃게 되었고, 아내는 정신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열대기후와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도 고난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캐리는 인디고 공장의 감독으로 일을 하기 시작하였고,  충분한 선교비를 벌면서 선교의 기초가 되는 인도어 공부에 열중한 끝에, 인도어 성경번역과 더불어 인도어로 말씀을 전파하고 또 여러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벵갈에서 7년간 땀흘렸지만, 단 한명의 인도인 개종자가 없었습니다.


 

 1800년, 19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동인도 회사의 추방령으로 캐리는 선교기지를 덴마크 영내인 세람포로 옮기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첫 번째 개종자가 탄생했습니다. 그가 카스트제도와 우상숭배를 거부하자 2천명의 군중이 그를 재판장으로 끌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회개와 변화의 역사가 줄기차게 일어나, 그 후 18년간 600명이 세례를 받고 수천명이 예배에 참석하는 승리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세람포에서 역사가 흥왕히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합심동역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 많은 인도방언과 중국어· 버마어·  말레이어등 44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 출판했습니다.

 윌리암 캐리는 이처럼 그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위대한 일을 시도함으로 인도선교의 기초를 쌓았습니다.

 캐리는 1834년 73세로 그토록 사랑했던 인도 세람포에 묻혔습니다.

 윌리암캐리가 인도에 끼친 영향은 언어적, 교육적인 일들 뿐 아니라, 과부의 화형이나 유아살해 같은 인도의 나쁜 관습을 폐지하고 좋은 전통을 계승시켜 나가도록 했습니다.

 그는 40년동안 인도에서 침례교인 의사로, 목사인 복음 전도자로 인도 선교를 시작하여, 언어학자· 성경 번역가· 선교사· 교육가로 포기하지 않고, 끈기있게 활동한 선교사였습니다.

 

                                                                                                                by  선교타임즈

 

 

"윌리암 케리의 생애와 선교사" 윌리암케리1.hwp 의 실제파일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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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를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Ibid.,p.18
수 주일동안 진지하게 생각한 끝에 케리는 그리스도께서 먼저 자신에게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평안을 얻었다.

                                                    3. 목사가 되다
 18세 때 침례교도로 전환한 케리는 영적으로 급속히 성장하면서 삶에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그는 1781년 자신의 직장 주인의 처제 도로시 플레킷(Dorothy Plackett)과 결혼하였다. 당시 도로시는 25세였고 케리는 20세의 생일을 맞기 직전이었다. 케리는 1783년 노스햄프턴의 넨강(the River of Neu)에서 세례를 받았다.
S.L.Baldwi,「Foreign Missions of the Protestant Churches(New Yo가 : Eaton &Mains,1900),p.88.-김규곤의 석사학위 논문"윌리암 케리의 생애와 선교사역 연구", p.8. 재인용

 피팅톤으로 이사한 후 케리는 마을 아이들을 위해 야학을 열기도 했으며 자신 또한 성경연구를 열심히 했다. 그래서 성경을 원어인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보기 시작했다. 이 일은 후에 그로 하여금 목사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되게 한다.

 학문에의 길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독학으로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 등 고전어와 이태리어, 프랑스어, 화란어 등 현대 유럽언어와 후일에는 인도어, 뱅갈어 등 동양언어를 독학으로 습득하였다. 또 여러 가지 책을 통해 학식을 넓혀갔다.

 

 1785년에는 피팅톤에서 18킬로미터 떨어진 몰튼 마을로 이사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그는 교사로 임명되었고, 케리는 이곳에서 학교와 구둣가게를 동시에 운영하게 된다.
켈시 피니, op.cit.,p.24.

 케리의 집 옆에는 침례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목회자가 없던 이 교회에서 케리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그 교회의 일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었다.

 1786년 8월 10일 케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Ibid., p25

 그해 11월 몰튼 교회는 케리를 정식 목회자로 받아들였고, 다음해 3월에 케리는 목사로 안수 받는다. 그는 한 사람이라도 더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목회사역에 진력하였다.

 몰튼교회에서 4년을 섬긴 후 케리는 레스터의 하비레인(Harvey Lane)교회로 옮기게 된다. 케리는 1789년 가을부터 레스터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S.P.Carey, 「William Carey(London:The Carey Press, 1942),p.49 -김규곤, op.cit., p.10. 재인용

 이곳은 모든 면에서 몰튼보다 조건이 나은 편이었다. 케리는 부지런하였다. 목회하는 동안 일주일의 하루하루를 계획적으로 보냈다. 월요일에는 고전을 읽었고, 화요일에는 과학에 대한 기본 서적을, 수요일에는 역사에 관한 책, 그리고 글쓰는 일 또 다른 날에는 히브리어 성경 헬라어 성경, 주말이 다가올 때 설교준비 등으로 알찬 목회자로 생활하였다.

 그는 많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좋은 환경이 주어지지 못했지만, 강단에서 그의 입술을 통해 전해진 말씀들은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였다. 그의 설교는 능력이 있었고 회중의 마음을 사로잡곤 하였다.

 

 
                                      4. 선교의 소명과 선교회 조직
 몰튼에서의 4년간의 어려운 목회생활은 케리에게 보다 많은 것을 얻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들을 마련해 주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마을의 사람들을 섬기며,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근근히 살아가던 어려운 때에, 전혀 예기치 않은 도구를 통하여 선교사로서의 부름을 받게 된다.

 어느 날 케리는 "쿡선장의 마지막 항해(The Last Voyage of Captain)"을 읽고 있었다. 태평양의 알려지지 않은 섬들을 열심히 찾아다녔던 탐험가 쿡 선장의 여행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접하게 된다.

  "아무도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아무 명예도 이익도 뒤 따르지 않기 때문이지요. "

 쿡 선장의 항해기는 그의 선교열을 뜨겁게 자극하였다. 이방족속과 섬들, 산호초, 옷을 입지 않은 야만인들, 부족 전쟁과 식인파티 등 흥미진진한 항해기를 읽던 케리는, 이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온통 사로잡히게 된다.
캘시 피니, op.cit.,p.27.

 교실벽에 붙어 있던 세계지도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는 이미 알려진 나라의 인구와 종교, 또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을 지도 위에 표시해 가면서, 선교지도를 매일매일 알차게 만들기도 하였다. 케리는 또한 조나단 에드워드의 책도 읽었고, 미국 인디언들을 위하여 선교했던 존 엘리엇과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작품도 자세히 탐독했다.

 

 특별히 조나단 에드워드가 브레이너드의 일기와 편지를 모아 출판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는 케리와 헨리마틴(H두교 Martin)등 후대의 많은 선교사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감동과 새로운 영감을 제공해 주었다.

 케리의 학구적인 열심은 "이교도의 개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관한 연구(An Enquire Into the Obligation of Christian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란 논문을 발표하게 했다. 이 책은 1792년 봄에 라이체스터에서 출판되어 선교사역의 고전이 되었다. 케리의 책은 선교를 해야 하는 논리적 이유를 명쾌하게 제시했는데, 이는 수많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선교의 세계적 차원을 보고 선교사역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게 하였다. 힘이 넘치는 그의 강력한 결론은, 기독교에 있어서 선교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는 것이다.
William Carey, Editor Francis M.Dubose, An Enquire Into the Oblgation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 -「Classics of Christian Missions」(Nashville Tennessee:Broadman Pres,1979),p.22. - 김규곤, op.cit,p.13. 재인용

 이 책이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1792년 5월 30일에 노팅햄의 침례교 교역자 연합회 모임에서 설교하게 되었다.
J. 허버트 케인, 신서균,이영주 공역,「세계선교역사」(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P.114.

 그는 여기서도 복음을 전 세계인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을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이 설교는 두 가지 요점의 선교를 위한 감동적인 호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결과를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십시오."

 
 선교에 대한 케리의 주장과 열정은 당대 가장 유명한 침례교 목사 가운데 하나인 엔드류 풀러(Andrew Fuller)를 설복시켰다.
캘시 피니, op.cit.,p.42.

 1892년 10월 2일 케터링에서 개최된 협회의 차기 모임에 참석한 침례교인들은, "이방선교를 위한 침례교 특수 선교회를 구성하기로 하다"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케리처럼 적은 수입으로 사는 대부분의 참석자들에게, 이것은 부담이 되는 결정이었다. 12명의 목회자들과 신학생 한 명, 평신도 한 명이 기구 발족을 위해 13파운드 1실링 6펜스를 기부하겠다는 서명을 하였다. 엔드류 풀러는 그 선교회의 첫 총무가 되었다.
Ruth Tucker,op.cit.,p.144.

 

 


                                           5. 선교사로 출발하다.
 이 특수 선교회는 나중에는 단순히 침례교 선교회(BMS)로 불리게 되었다. BMS에서 처음 임명한 선교사는 존 토마스(John Thomas)였다. 그는 의사로서 평신도 선교사였다. 영국 해군을 따라 인도에 가서 복음전도자로 자유롭게 활동하며 머문 적이 있었다. 그는 영국에서 돌아와서 자원해서 인도 선교사로 나선 것이다. 케리는 자신이 토마스와 동반하겠노라고 자원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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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op.cit.,pp.139-141.

 케리의 주위에는 좋은 동역자들이 있어서 효과적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와 케리 자신의 인격적 성숙과 노력이 이런 관계들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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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라,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 attempt great things for God)


 1792년 노팅햄에서의 설교에서 케리가 한 말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을 주기 위해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말은 열정적인 케리가 무력감에 빠져있는 성도를 각성시키기 위해 외친 감동적인 슬로건이 아니다. 이 말은 당시 그의 삶의 주제이자 생활의 지표였고, 그의 경험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기술해 놓은 것이었다.

 그는 세계선교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과업이 바뀌어 가는 과정을 목격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효율적인 삶을 살고 싶어했으며 또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귀하게 쓰임받기를 진실로 원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다.

 케리의 선교적 헌신은 위대한 세기로 흐르는 거대한 선교 물줄기의 시작으로 힘있게 솟았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케리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선교사 케리에 대한 연구를 통해, 오늘 이 시대에도 케리와 같은 헌신적인 선교사가 계속 배출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참고도서
고신대학교 기독교사상연구소,「선교신학과 선교이슈」,기독교 사상연구 제6호, 2000년 3월
김규곤, 「윌리암 케리의 생애와 선교사역 연구」-석사학위 논문, 서울, 장로회 신학대학, 1996
김동선, 「하나님의 선교」, 서울, 한국장로교 출판사, 2000
박광철, 「이렇게 선교하자」,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2
박영호,「선교학」,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8
이광수, 이용원,「선교학 개론」, 서울, 한국장로교 출판사, 1993
이상규,「한국교회와 선교」, 부산, 고신대학교 선교대학원, 2000
전호진,「선교학」, 서울, 개혁주의 신행협회, 1985
J. 허버트 케인, 신서균, 이영주 공역,「세계선교역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3
Robert Linder, 권성수 역, 「윌리암 케리」, 서울, 도서출판 횃불, 1995
Ruth A. tUCKER, 박해근 역,「선교사열전」,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Stephen Nell,「기독교선교사」, 서울, 성광문화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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