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그릴 베그 기념탑.
(12세기에 건축)
기영에게.
자, 오스만 투르크 이야기의 시작이다.
그런데 솔직히 많이 애매한 것이,
오스만 투르크 이야기의 시작이다... 라고는 해도 곧바로 오스만 투르크를 건국하는 오스만 1세 이야기부터 시작할 수는 없다는 거야.
한 나라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엔 모두 그렇겠지만,
그 나라의 역사는 그 나라의 건국에서부터 이야기하지 않는 법이거든.
당장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조선의 건국 부분을 펼쳐도,
고려 말 이야기부터 나오지 태조 이성계부터 나오지는 않으니까.
다시 말해, 그 나라의 건국부터가 아니라 그 나라가 건국된 배경부터 보는 법이거든.
그래서 조금 고민이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건국부터 이야기할 수는 없고, 그 이전부터 이야기해야 하는데 어디부터가 좋을까... 하고.
그러다 결론을 내린 것이, 오스만 투르크 바로 이전의 국가인 셀주크 투르크의 건국부터야.
지난번에 보낸 연표로 셀주크 투르크 건국 이전의 세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대략 감을 잡았을 거라고 믿고,
셀주크 투르크 이야기를 시작할게.
투르크인은 원래,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동남부에 걸쳐 있었던 유목민족들을 일컫는 말이래.
유목민족들이라 그런지 자료가 많이 부족한 편인데...
이 투르크인 가운데 중앙아시아에 오구즈 투르크 일족이라는 사람들이 있고, 그 가운데 훗날 셀주크 투르크라고 불리게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해.
9세기 중반.
신라와 당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고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어가던 9세기 중반, 셀주크라는 이름의 수장이 지휘하는 투르크인 무리 하나가 이란 북부인 카스피 해와 아랄 해 연안으로 이동한다.
(아마 수장 셀주크의 이름을 따 셀주크 투르크라고 불리지 않나 싶다. 오스만 투르크도 그렇고...)
그리고 그곳에서, 이슬람 수니파로 개종했다고 해.
타지키스탄의 위치와 타지키스탄 서북부에 위치한 후잔트의 위치.
후잔트 부근에서 셀주크 투르크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하는데,
아랄 해와는 위치가 다소 맞지 않는다.
카스피 해와 아랄 해 연안이라는 설명은 위키백과 한글판의 것이고,
후잔트라는 설명은 위키백과 영문판의 것이다.
10세기에 이르면 셀주크 투르크는 페르시아로 이주, 페르시아에서 수십년 동안 눌러살면서 그곳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이는 등 페르시아와 점차 동화되어 갔다.
그러면서 당시 페르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사만 왕조의 용병으로 활동하면서, 주변의 카라한 왕조나 가즈니 왕조 같은 세력과 맞서 싸웠다고 해.
사만 왕조의 영토.
하지만 사만 왕조는 10세기의 마지막 해인 999년에 가즈니 왕조에 의해 멸망당해버렸는데...
그래도 셀주크 투르크는 운이 좋았는지, 이번엔 가즈니 왕조의 용병으로 고용됐대.
유목민을 용병으로 고용하는 제도는, 굳이 중국이나 로마 등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역시 널리 퍼져있던 모양이지.
가즈니 왕조의 최대판도.
한편 페르시아에서 수십년 눌러살거나 사만 왕조에서 가즈니 왕조로 '모시는 분'이 바뀌면서, 셀주크 투르크의 수장도 바뀌게 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셀주크 투르크의 세력도 조금씩이지만 확장되어 가는데...
결국 셀주크의 손자인 차그리 베그와 투그릴 베그 시대에, 이야기의 흐름이 바뀌게 된다.
세력이 점점 넓어져 가던 셀주크 투르크가, 1037년에 독립하겠다고 나서버린 거야.
이때가 바로, 셀주크 투르크라는 국가가 세워지는 때다.
그리고 같은 해인 1037년에 '모시던 분'이었던 가즈니 왕조의 수도 가즈니를 약탈하고 1043년엔 페르시아 대부분을 장악해버렸다니, 모르긴 몰라도 용병으로 있으면서 세력을 크게 넓힌 모양이지...
셀주크 투르크가 이렇게 세력이 넓어진 건, 아바스 왕조가 멸망의 극에 달해있었고 그에 따라 여러 왕조들이 난립해 있던 덕분이기도 했어.
아바스 왕조가 멸망하는 건 몽골의 침입으로 바그다드가 함락되는 1258년이니까 아직 한참 훗날의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국가로서의 아바스 왕조는 이미 숨이 끊어졌다고 봐도 좋았거든.
이게 무슨 이야기냐...
혹시 맘루크라고 들어봤어?
투르크계나 유럽계 출신 노예군단으로, 지연적, 혈연적 관계가 없어 칼리프에게만 충성을 바쳤다고 하는 사람들...
이 맘루크를 처음으로 궁정 경호원으로 등용한 인물이, 아바스 왕조의 7대 칼리프인 알 무으타심(재위: 833~842)이었다고 해.
하지만 아바스 왕조의 군사력이 약해지면서 점차 맘루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자, 스스로의 힘을 깨달은 맘루크가 아바스 왕조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결국 아바스 왕조는 861년부터 945년까지 맘루크들에 의해 좌지우지됐고, 그와 동시에 아바스 왕조 각지의 지방 호족세력이나 중앙에서부터 파견된 맘루크들이 반독립적 정권을 세우게 됐어.
아까 이야기한 사만 왕조니 가즈니 왕조니 하는 세력도, 아바스 왕조로부터 떨어져나갔거나 떨어져나간 왕조를 계승 내지 멸망시키고 세워진 왕조라고 보아도 좋은데...
특히 이 가운데 오늘날 이란 남서부와 이라크를 차지하고 있던 부와이 왕조 같은 경우, 945년에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에 입성하기까지 했다.
당시 칼리프이자 맘루크들로부터 정치적 위협을 받고 있던 알-무스타크피는 부와이 왕조를 대대적으로 환영하고 최고사령관 지위까지 내려주었는데...
1810년에 그려진 맘루크 기병.
훗날 이집트에 맘루크 왕조까지 세우는 맘루크는, 아바스 왕조 시대에 그 싹이 텄다.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부와이 왕조의 지원으로, 칼리프의 지위가 강화되었느냐고?
아니, 그야말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었지...
이후 아바스 왕조는 맘루크 대신 부와이 왕조가 좌지우지하게 되고, 심지어는 칼리프를 협박해서 부와이 왕조의 왕과 그 형제들에게 '국가의 강화자'니 '국가의 기둥'이니 '국가의 지주'니 하는 존칭까지 수여하도록 했어.
나라의 실권이 칼리프에게 없었다는 건 당연한 말이었고...
부와이 왕조의 영토.
비교적 연한 부분의 Baghdad가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다.
자, 다시 셀주크 투르크 이야기로 돌아가자.
셀주크 투르크 건국 18년째인 1055년, 셀주크 투르크는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물론 무혈입성이 아니라, 부와이 왕조와 전쟁을 벌이고 부와이 왕조를 멸망시킨 거였지.
그리고 셀주크 투르크의 바그다드 입성은, 아바스 왕조를 사실상 지배하는 세력이 부와이 왕조에서 셀주크 투르크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되는 거였고.
이때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셀주크 투르크를 이끄는 형제 가운데 동생 투그릴 베그에게 '동서(東西)의 왕'이라는 칭호를 수여했어.
이때부터 투그릴은 스스로를 술탄이라고 부르며, 칼리프의 수호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것으로 투그릴은 셀주크 투르크의 첫번째 술탄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그런데 나도 의문인 점은, 왜 형인 차그리 베그가 아니라 동생 투그릴 베그가 초대 술탄이 되었는가 하는 거.
차그리와 투그릴이 세력을 따로 이끌었고 차그리 세력이 더 약했던 건지, 차그리가 투그릴에게 양보했던 건지...
아무튼 그로부터 4년 뒤인 1059년, 차그리 베그가 세상을 떠났어.
그렇게 되자 투그릴 베그가 셀주크 투르크를 혼자서 이끌게 되었는데...
투그릴 베그 시대, 셀주크 투르크는 이란 서부와 메소포타미아를 차지하는 제국으로 발전했어.
영토도 넓겠다. 칼리프도 수중에 넣었겠다.
그야말로,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셈이지.
일개 유목집단으로 시작해,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패자가 된 셀주크 투르크.
다음 편지에서는, 셀주크 투르크가 오늘날의 터키가 위치해 있는 아나톨리아로 뻗어나가는 이야기와
셀주크 투르크의 전성기 무렵이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이야기해줄게.
그럼 그때까지,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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